나는 사진들을 보고 있다.
사진들의 주인공은 프랑스 인민전선의 주요 인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교육·문화부 장관이던 장 제다. 그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유급휴가를 도입했고 칸영화제를 창립했다.
그는 전쟁이 터지자 나치의 괴뢰정부인 비시 정권에 의해 수감돼 1944년 처형당했다. 그의 딸 엘렌과 사위 클로드가 나에게 그의 사진을 보여준다. 장 제는 미남은 아니지만 눈빛이 맑고 호인스러운 풍모가 몸에 배어 있다.
엘렌, 칼레드, 친구의 딸엘렌은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때 태어났기에 부녀가 함께한 사진들은 모두 면회 당시 찍은 것이다. 사진 한 장에서 아기 엘렌은 유모차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장 제는 엘렌의 유모차에 비밀 서한을 숨겨 감옥 바깥의 가족과 동지들에게 보냈어.” 장 제가 죽기 전에 보낸 마지막 서한의 마지막 문장은 “아비앙토”(다시 봐)였다.
이야기를 듣던 엘렌은 문득 내 손목의 단주를 발견하고는 자기 손목의 단주를 내게 보여준다. 단주 위엔 ‘옴’이라고 쓰여 있다. “옴, 우주의 첫 번째 소리예요. 오오옴, 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져요.” 엘렌은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어 “오오” 하는데 그것이 감탄사인지 “오오옴”을 발음하다 포기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클로드는 또 다른 사진을 보여준다.
거실 한구석에 제단처럼 마련된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는 칼레드의 사진과 아프리카산 목각 토속품들이 놓여 있다. “칼레드는 수단에 세 번 다녀왔어. 돌아올 때마다 기념품들을 가지고 왔지.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온 날 그는 쓰러졌어. 그는 내 품에서 힘겹게 말했어. ‘몸이 이상해요.’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어. 죽은 줄 알았던 가족들은 살았는데 살아남은 칼레드는 그렇게 죽었어.” ‘당신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의 이야기는 나 또한 슬프게 해요.’ 나는 속으로 말한다. 한국어로 한 번, 그리고 영어로 한 번.
테이블 옆에 또 다른 사진이 있다.
내가 클로드에게 선물로 준 흑백사진이다. 내가 직접 찍은 그 사진에는 십여 년 전 내 친구의 딸이 마리오네트 인형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담겨 있다. 클로드는 그 사진을 어느새 아랍식 문양으로 테두리가 쳐진 프레임에 넣어놓았다.
‘클로드의 죽은 친구 옆에 내 친구의 살아 있는 딸. 복잡한 패턴 속에 단순한 패턴.’ 나는 속으로 말한다. 이번에는 한국어로만.
클로드와 산책을 나가 루아르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널 때, 그가 말한다. “이 다리 아래서 칼레드가 몇 달간 살았어. 대학살을 피해 수단에서 탈출해 프랑스로 넘어온 직후였지. 그 더운 나라에 살던 친구가 여기서 몇 달을 노숙했으니 건강이 많이 망가졌을 거야. 더구나 그는 담배를 쉬지 않고 피웠어. 슬퍼서 그랬을 거야.”
“네가 머무는 방에는 곧 시리아 난민이 올지 몰라.”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내 집에 머물던 난민들이 문제를 일으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혼자서도 이해하다시인, 비평가, 퇴직 교수, 사회운동가, 유대인, 동양인, 아프리카인, 아랍인, 그리고 유령들. 이들은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건네준다. 그 사진들에는 번역해야 할 언어가 없다. 한국어도, 프랑스어도, 영어도, 아랍어도 없다. 몸짓, 얼굴, 눈동자, 그림자, 흔들림, 형상, 흔적, 침묵, 빛, 어둠만이 있다.
나는 사진들을 보고 있다. 내가 먼 훗날 그 사진을 다시 본다면 그때는 혼자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는지, 그들이 사진들 속에서 어떻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시간으로 만들고 있는지.
심보선 시인·사회학자* 심보선 시인의 ‘노 땡큐!’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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