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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지 못하면 돌아가지 못하리

북스피어·피니스아프리카에 공동주최 ‘낭만독자 열차교정’ 참가기
등록 2015-06-20 18:10 수정 2020-05-03 09:54
*이 미스터리의 결론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구둘래 기자

구둘래 기자

6월6일 현충일 정오를 10분 지나 서울 청량리를 출발한 무궁화호 제1635열차 일반실 5호칸. 열차칸 정중앙, 돌려서 마주 보게 만든 자리에 8명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열차에서 에어컨을 틀더라도 창문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더운 날씨였는데 8명은 시루에 꽂힌 성장기의 콩나물처럼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의자에서 뻗어나온 몸의 최전선인 무릎은 좁은 틈을 사이에 두고 조금만 움직여도 맞닿았다. 엉덩이를 의자에 바싹 붙이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90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런 무릎과 무릎 사이에 원인이 있었다. 아니, ‘더군다나’는 여기에 쓸걸 그랬나. 성인 8명이 마주 앉다니 민망한 게 제일 크다. 누군가가 기차칸으로 올라타 람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들은 처음 보는 사이다. 올라타자마자 짐을 짐칸으로 올린 8명은 흰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들은 민망함을 그 종이로 가렸다. 그들이 보는 종이 뭉치의 제일 앞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구경꾼의 눈에만 보이는 오자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한 이들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것은 8번에 있다.

언제 어디서든 혼자가 되는 것. 책 읽기다. 진행 방향 왼쪽 4명이 읽는 것은 미치오 슈스케의 이다. 오른쪽 4명이 읽고 있는 것은 미야베 미유키의 이다. 서점에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둘 다 출간 예정작이기 때문이다. 앞의 것은 피니스아프리카에, 뒤의 것은 북스피어의 출간작이다.

낭만이라기보다는 무릎 사이 긴장이 흐르는 열차 여행의 이름은 ‘낭만독자 열차교정’. 90도로 반듯하게 앉은 자세니 허리 ‘교정’에는 좋을 듯하다. 여행 이름을 들은 편집장이 ‘수감자 교정’이 연상된다고 했지만, 이 열차를 탄 사람이 내릴 때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진 않다.

‘출판 이벤트’ 전문가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이하 김 사장)가 자신의 (그리고 출판사의) 10년간의 행적을 모아 최근에 펴낸 (어크로스 펴냄)에 따르면, 이 이벤트는 출판사의 첫 책인 에서 시작되었다. 총 8권짜리인 이 전집은 편집하는 데만 1년 가까이 걸렸다. 여러 번 보았지만 미심쩍음은 가시지 않았다. 전문가에게 교정을 맡기려니 한 권당 120만~150만원이 들었다. 다 합치면 1천만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독자 교정이다. 이벤트 공지글에는 궁상스러움을 포장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더 있다. “‘이번 책에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눈에 불을 켜고 교정지를 읽고 또 읽지만 (…) 어이없는 오자가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 (반복해서 읽는 편집자는 지나치고 독자들이 오자를 잘 발견하는 것은) 장기판 옆에서 훈수를 두는 구경꾼의 심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깜짝 놀랄 만큼 재밌어 아껴둔 행사

독자 교정 이벤트는 밤샘 교정, 교정 MT로 변형됐는데 지금 가장 진화한 형태가 낭만독자 열차교정이다. 독자 교정계의 메르스인 셈이다. 청량리를 출발해 강원도 강릉 정동진에 5시36분 도착하는 열차에 앉아 ‘꼼짝없이’ 교정을 본다. 두 책의 출판사가 연합으로 진행하고 있다. “지지난해 처음 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재밌어서 올해 하는 것으로 아껴놓았다”(김 사장)고 한다. 올해 들어서는 두 번째 행사다.

기자는 북스피어 쪽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쪽에 앉아 있다. 아니 의자에 붙어 있다. 북스피어가 처음으로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도록 한 것이 빈 페이지에 ‘미미 여사 파이팅!’을 써넣은 덕분이었으니, 그때부터 출판사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작가의 작품이다. 열차교정자의 숙제는 와 을 읽어오는 것이었다. “인생에 부족함이 없거나, 또는 행복한 삶을 사는 탐정은 미스터리의 세계에는 무척 드문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평범하고 이렇다 할 장점도 없지만 일상생활이 안정되어 있어 포근한 행복 속에 사는 탐정”( 지은이의 말)이 두 편의 주인공이다. 은 그 행복한 탐정이 등장하는 최신작이다. 스기무라 사부로는 재벌기업 회장의 혼외딸과 결혼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은 재롱이 한창이다. 아내는 아름답고, 앞에만 서면 주눅 들긴 하지만 장인 어른은 사위를 인정해준다. 그러니 스기무라의 ‘탐정놀이’는 문외한들의 ‘교정놀이’와 비슷하다.

모든 일이 정해진 대로 일어난다고 믿는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1) 8번의 규칙을 어기고 ‘소풍’(43·닉네임)이 “번역자가 바뀌었죠?”라고 옆자리 김 사장에게 묻는다. 엘레인강(33)이 “이전과 많이 다르네요”라고 덧붙인다. 김 사장이 번역자 이름을 밝히자 소풍은 “아, 그분이 이런 스타일이었나”라며 다시 교정지로 돌아갔다. ‘대화 금지’되어 있지만 공력이 상당한 분들이다. 엘레인강이 말한다. “쉼표가 많네요.” 김 사장이 답한다. “이번 건 특히 많더라고요. 많이 뺀 게 이렇습니다.” 그 틈에 엘레인강은 다른 교정지를 슬쩍 본 뒤 옆 사람에게 말을 붙인다. “교정지에 표시할 게 없는데 다른 분들은….” 김 사장의 ‘찌릿’이 와 박힌다. 교정지는 최종 교정본으로 체크할 게 별로 없다.

“바람이 프랑스어와 간지럽혔다”
집에 돌아갈지 어떨지 모른 채 웃고 있는 ‘낭만독자 열차교정’ 이벤트 참가자들. 북스피어 제공

집에 돌아갈지 어떨지 모른 채 웃고 있는 ‘낭만독자 열차교정’ 이벤트 참가자들. 북스피어 제공

10년도 더 전에 기자가 출판사에 다니던 시절, 서평에서 큰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서평의 원문을 찾을 길 없어 기억에 의존하여 옮기면 “신이 만든 책에도 오자가 있는 법”. 서평자의 눈에 띈 오자는 생물체의 키를 표시하는 기호였다. cm가 아니라 m로 되어 있었다. 서평자는 잘못을 칭찬으로 바꾸어 하는 훌륭한 분이셨다. 그즈음 도저히 칭찬으로는 바꿀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곤 했는데, 책의 ‘연수’를 ‘단물’로 일괄 교정하는 등의 일이다. “대뇌의 좌우 반구에서 나오는 신경은 ‘단물’에서 교차” 이런 문장이 책에서 ‘갑툭튀’했다. 작가 김연수가 책에 등장했다면 김단물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 첫 번째 페이지에서 “바람이 프랑스어와 간지럽혔다”를 발견했다. 불어를 프랑스어로 일괄 교정하다 생긴 일이다. 누구를 탓하며 누구를 비웃으랴.

에서 샐러리맨 형사 스기무라는 또 사건에 휘말린다. 이번에는 버스 납치 사건이다. 아내는 도입부에서 왜 당신한테만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냐며 속상해한다. 남자는 기지를 발휘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이 너무 불평등해서겠지” 대답. 어쨌든 에르퀼 푸아로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벌어지는 것과 흡사하다.

얼치기지만 편집자였기 때문일까.(*2) ‘수업’이라는 단어가 걸렸다. “학교만 나와서는 안 돼. 수업(修業)을 해야지.” 검색을 하지 말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찾아보았다. 학교에서 받는 수업은 ‘授業’, 한자를 참조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찾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받은 교정지는 500쪽. 원래는 900쪽이라고 한다. 책은 한 권으로 출간된다. 자리가 드문드문해지자 다리를 펼 수 있는, 앞쪽으로 다리를 올릴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감시의 눈길이 없으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표시 안 된 페이지 위로 침이 떨어지고… 괜스레 중앙통로로 갔다가 식당으로 갔다가 한다. 옆자리에서 챙긴 젤리를 이가 파열음 소리가 나도록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열심히 한 척하며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다른 이들은 꼼짝없이 앉아 있다. 5시간이 되도록 본 페이지는 200쪽, 제목이 왜 이런지 감이 안 잡힌다. 원제는 (ペテロの葬列), 베드로는 또 뭔가.

바다 옆을 달려도 바다를 못 보는 비극
이벤트 참가자들이 교정을 본 미치오 슈스케의 <랫맨>과 미야베 미유키의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랫맨>의 표지는 6월12일 현재 아직 나오지 않았다. 북스피어 제공

이벤트 참가자들이 교정을 본 미치오 슈스케의 <랫맨>과 미야베 미유키의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랫맨>의 표지는 6월12일 현재 아직 나오지 않았다. 북스피어 제공

피니스아프리카에의 박세진 사장은 의 독자 교정자를 모집하면서 ‘#우리책은북스피어책보다3배가량짧으니얼른보고놀수있다’라는 태그를 달아놓았다. 동해를 지난 뒤 등산복을 입은 산악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즈음 ‘랫맨’들은 교정이 끝나고 여행이 시작되었다. 맥주캔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기차는 바다를 끼고 달린다. “와, 바다다.” 옆자리에서 소리를 지른다. 교정지에서 눈을 떼고 바다를 본다. 김 사장의 ‘찌릿’이 와닿는다. 아,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표시는 아래에 나오는 책에서 인용한 문장입니다.
*1. , 루이즈 페니, 피니스아프리카에
*2. ,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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