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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 지독한 개인

아버지가 죽기 전 1년에 걸쳐 보낸 이메일을 책으로 구성해 펴낸 홍재희의 <아버지의 이메일>
등록 2015-05-14 17:48 수정 2020-05-03 04:28
* 아버지의 이메일 본문 가운데 철자가 틀린 것이 있으나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어느 날 밤, 모두 잠들었을 때 깜깜한 부엌에서 식칼을 집어들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소리가 나자 내다본 것이다. 칼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어머니를 샌드백인 양 두들겼다. 그런 아버지가 죽었다. 2008년 12월23일.

빨갱이 혐오자, 술꾼, 이민에 미친 사람…
두 딸과 함께 사진을 찍은 아버지. 아버지의 ‘이민’의 꿈은 언니가 이뤘다. 바다출판사 제공

두 딸과 함께 사진을 찍은 아버지. 아버지의 ‘이민’의 꿈은 언니가 이뤘다. 바다출판사 제공

아버지는 죽기 전 1년간 43통의 이메일을 보냈다. 보낸 상대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한 딸이었다. 첫 메일의 문장은 “재희야! 애비의 회고록이라야”에서 “재희야”, “나의 사랑하는 재희야^^^”로 변해갔다. 1월23일 시작된 이메일은 12월20일 죽기 사흘 전 마지막으로 발송되었다. 딸이 맨 처음 이메일을 발견했을 때 든 생각은 “어디서 인터넷을 배워서…”였다. 이메일이 이어지자 나중에는 확인이 귀찮아서 ‘아버지’라는 폴더로 넣어버렸다. 죽고 나서야 이메일이 생각났다. 그 메일을 차근차근 읽어내려갔다. 통곡이 흘러나왔다.

홍성섭씨의 딸 홍재희는 영화감독이었다. 이 이메일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한다. 프로젝트는 2012년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사전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되었고 2013년 완성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고 2014년 극장에 개봉했다. 2015년 이메일을 그대로 실은 책으로 나왔다. (바다출판사 펴냄, 1만2800원).

아버지는 떠나고만 싶어 했다. 맨 처음 떠난 것은 황해도 고향이었다. 1947년 당신의 아버지가 월남한 뒤 학교가 못 견디게 힘들어진 아버지는 열네 살에 첫 월남을 시도한다. 세 번째 시도 끝에 열다섯 살에 남쪽으로 내려온다. 서른 살 서독 파견 광부 모집에 지원하지만 첫사랑 미스안만 간호사로 파독된다. 서른두 살 결혼하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에선 브라질로 이민가려고 알아보았다. 미국 이민도 실패한다. 마흔셋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 일하러 갔고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을 알아보지만 성사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삶은 모순투성이였다. 사우디에서 세 번째로 귀국한 아버지는 신원조회에 걸린다. “신원조회에서 처남이 6,25 때 적색단체인 정치보위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외 출국 금지를 당했다. 그래서 미국이나 브라질 이민의 끔도 접고 한동안 방탕생활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빨갱이가 싫어서 북에서 도망쳤는데 다시 빨갱이 집이랑 결혼했다고 악악댔다. 어머니는 폭력에 못 이겨 차라리 이혼하자고 했다. 연좌제의 희생양인 아버지는 더 약한 어머니를 희생양 삼았다.

친척은 아버지를 머리에 “돈돈돈”밖에 안 든 사람이라고 표현했다(다큐멘터리). 스무 살에 파지 장사로 어마어마한 돈을 모으고 집을 25채나 짓는다. 하지만 군대 가 있는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넷째 계모가 재산권 청구 소송을 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헐값에 팔아버린다. 술 먹을 때면 “돈돈돈”거리는 레퍼토리의 탄생이다.

뒤늦게 배운 이메일, 포토숍
문화센터에서 배운 실력으로 포토숍을 한 증명사진. 바다출판사 제공

문화센터에서 배운 실력으로 포토숍을 한 증명사진. 바다출판사 제공

아버지는 생활력이 없었다. 대기업을 다니다 그만두고 베트남을 갔다오고 사우디를 갔다온 이후 아버지는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대부분을 죽을 듯이 술을 먹으며 보냈다. 죽었을 때 남은 것은 서울 금호동 23평 구옥 한 채가 다였다. 그 또한 금호동 일대 재개발 추진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서 날아갈 처지였다. 아파트로 들어서려면 추가 분담금 3억원이 더 필요했다. 아버지는 전횡에 항의하는 비대위의 최고령 상근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감독이 된 둘째딸에 살정이 붙었다. 첫째의 재롱은 베트남에 가 있어서 못 보았고 셋째는 임신했을 때 사우디로 떠났다. 아버지는 죽어도 갖고 갈 이야기라며 말한다. 태어난 둘째에게서 용종을 발견하고 병원을 찾아다녀 결국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이해가 됐다. 동네에서 놀고 있으면 왜 사람들이 “죽을 애가 살았네, 효도 많이 하라”고 했는지 알게 됐다.

집에 들르면 늙은 아버지는 컴퓨터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딸은 아버지에게 “탑골공원 같은 데나 놀러다니시라”고 짜증을 냈다. 아버지는 이메일에 증명사진을 포토숍해 보냈다. 지나온 역사가 사진으로 흘러가고 배경음악으로 경음악이 깔리는 이메일도 수시로 띄웠다. 43통의 이메일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 메일들은 책에 실리지 않았다. 과의 전화 통화에서 홍 감독이 그랬다. “그런 건 저도 못해요.” 홍 감독이 인정하는 게 또 있었다. “나중에 가면 저보다 더 글을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돌아가시기 두 달 전 아버지는 틀니를 하수구에 빠뜨렸다. 아버지는 틀니를 줍는다며 하수구로 들어갔다. 119가 달려와 아버지를 구했다. 일찍 구하지 못했으면 질소에 의해 질식사했을지 모른다고 구조대원이 말했다. 울면서 등짝을 때렸는데 아버지는 다다음날도 들어갔다.

“그렇게 원하고 찾기를 바랬뜬 그 틀이가 돌에 걸려 반짝거리고 잇지 않겠니. …그때 나의 감정은 질소에 의한 질식사보담도 아무렀지 않게 출구를 향해 달렸다.”

“내가 언제 이승을 떠날지는 모루겠으나 요사이는 하루하루 지나는 것이 지겨웁고 서러워 산다는 게 이처럼 고통수러울 수가 없다. 아침에 잠에서 깨여나면 그렇게도 무섭고 두려울 수가 없다.” 이메일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무섭다고 말할 수 있었고 간절하게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무능한 애비에게 태여나서 호강 한 번 제대로 못하고 편치 않은 집안에서 싸음박질만 하는 것을 보고 자랐으니 무순 인간미를 보았겠누냐? 이 모두가 아버지의 무능 또는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못된 습관 때문이라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의 덕수와 아버지
아버지의 007 가방에서 나온 증명사진. 바다출판사 제공

아버지의 007 가방에서 나온 증명사진. 바다출판사 제공

다큐멘터리가 여러 주변 인물을 통해 아버지를 구성해나간다면, 책은 아버지와 자신과의 대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아 (이메일을 쓰며) 아버지도 그랬겠구나.”

홍 감독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가 전공이다. “아마 극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제가 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 자신이 객관화가 안 됐는데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할 수는 없으니까요. 허구와 타협할 소재가 아니니까요.”

아버지에겐 의 덕수 같은 보편성이 없다. 허점투성이의 모순에 가득 찬 인생이다. “표지도 그렇고 영화 포스터가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어버이날에 어울리는 따뜻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대한민국에는 개인이 없잖아요. 역할을 하기 전에 한 사람으로 인정해달라, 그게 이 책의 메시지예요. 그들은 부모 이전에 한 인간이니까요.”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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