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런 게 운명일까. 늦은 밤, 만리재 기슭의 신문사 건물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내게 미래의 꿈을 물으면, 나는 미욱한 사람답게 애매하게 답하곤 했다. “그냥 양옆에 책을 잔뜩 쌓아두고 뭔가를 쓰고 있지 않을까. 그게 소설이든 뭐든 말이야.” 역시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안양천 건너 구로공단의 동시개봉 극장에서 본 ‘방화’(邦畵)에서 기자라는 직업을 만난 것은. 영화에서 기자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깃을 세워 바람을 막고, 시외버스를 타고 다녔다. 사람들을 만나 무언가를 묻고, 또 무언가를 향해 떠나는 막연한 뒷모습에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것 같다.
소설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어찌어찌 기자가 되었고, 또 어쩌다보니 책팀에 오게 되어 “양옆에 책을 잔뜩 쌓아두고 뭔가를 쓰고 있”으니 이만하면 꿈이 이뤄진 것일까.
출판계에 와보니 불황이라고 아우성이다. 책 발행도 줄고 소비는 더 줄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제 ‘조·중·동’은 더 이상 책 읽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거실을 서재로 바꾸자며 무슨 새마을운동처럼 캠페인을 벌이던 신문은 이제 더 이상 책이 우리의 미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요즘 대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며 때만 되면 늘어놓던 잔소리도 사라졌다.
한때 경쟁적으로 ‘북섹션’을 만들며 독서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들 신문의 현재 북섹션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일주일에 2~3개 면이 고작이다(는 7개 면, 은 5개 면이다). 혹시 이들은 알아버린 게 아닐까. 출판시장, 특히 인문·사회 분야(때로는 과학 분야도 포함해서)의 책은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책을 읽을수록 자신들의 적이 늘어나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책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마지막 보루요 요새가 아닐까. 이성보다 광기가 갑질을 하는 세상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인간 구실을 하려면 책을 붙들 수밖에 없다. 해마다 해오던 여름휴가철 책 특집을 소개하면서 너무 거창한 화두를 꺼낸 건 아닐지 쑥스럽다.
퇴계 이황은 장인에게서 1만 권의 책을 물려받은 아버지 이식 덕분에 어려서부터 책에 둘러싸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구양수의 삼다(다독·다작·다상량) 가운데 게걸스럽게 읽는 다독보다는 정독과 숙독을 더 중히 여겼다 한다. 무조건 ‘많이’ 읽기보다는 ‘잘’ 읽어야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얘기다.
불황이라고 해도 매주 내 책상에는 적게는 60~70권, 많게는 100여 권의 책이 쌓인다. 이 가운데 독자에게 소개할 만한 책은 10~20%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소개하는 11권의 책은 가 매주 골라낸 책 중에서도 지난 1년치를 통틀어 다시 골라낸 책들이다.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 정독 혹은 숙독해보시기 바란다. 당신이 광기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갈지 모를 때, 손 내밀어 잡을 수 있는 정신적 노끈이 되어줄 것이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미국, ‘한국 대미투자 1호’로 에너지 사업 요구 [단독] 미국, ‘한국 대미투자 1호’로 에너지 사업 요구](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204/53_17702063577611_20260204503883.jpg)
[단독] 미국, ‘한국 대미투자 1호’로 에너지 사업 요구

‘파면’ 김현태 극우 본색 “전한길 선생님 감사합니다…계엄은 합법”

박영재 법원행정처장 “이 대통령 선거법 사건 파기환송, 헌법·법률 따른 판결”
![현무-5와 12식 지대함 미사일 [유레카] 현무-5와 12식 지대함 미사일 [유레카]](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204/53_17701902823798_20260204503163.jpg)
현무-5와 12식 지대함 미사일 [유레카]

‘서해 피격’ 무죄 박지원, 윤석열 고소…“정적 제거에 국민 죽음 악용”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재산 비례해 보험료 부과 정률제 추진

장동혁 “이 대통령에 단독회담 요청…16살로 선거 연령 낮추자”

‘핵무기 족쇄’ 사라졌다…미·러 핵군축조약 ‘뉴스타트’, 5일 종료

장동혁, ‘한동훈계’ 솎아내기 수순?…조정훈 인재영입위원장 임명에 시끌
![[단독] 퇴근하려는데 “우리 남편 밥 차릴래?”…강요된 1인2역 필리핀 도우미 [단독] 퇴근하려는데 “우리 남편 밥 차릴래?”…강요된 1인2역 필리핀 도우미](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204/53_17701861372936_20260204502539.jpg)
[단독] 퇴근하려는데 “우리 남편 밥 차릴래?”…강요된 1인2역 필리핀 도우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