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운명일까. 늦은 밤, 만리재 기슭의 신문사 건물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내게 미래의 꿈을 물으면, 나는 미욱한 사람답게 애매하게 답하곤 했다. “그냥 양옆에 책을 잔뜩 쌓아두고 뭔가를 쓰고 있지 않을까. 그게 소설이든 뭐든 말이야.” 역시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안양천 건너 구로공단의 동시개봉 극장에서 본 ‘방화’(邦畵)에서 기자라는 직업을 만난 것은. 영화에서 기자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깃을 세워 바람을 막고, 시외버스를 타고 다녔다. 사람들을 만나 무언가를 묻고, 또 무언가를 향해 떠나는 막연한 뒷모습에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것 같다.
소설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어찌어찌 기자가 되었고, 또 어쩌다보니 책팀에 오게 되어 “양옆에 책을 잔뜩 쌓아두고 뭔가를 쓰고 있”으니 이만하면 꿈이 이뤄진 것일까.
출판계에 와보니 불황이라고 아우성이다. 책 발행도 줄고 소비는 더 줄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제 ‘조·중·동’은 더 이상 책 읽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거실을 서재로 바꾸자며 무슨 새마을운동처럼 캠페인을 벌이던 신문은 이제 더 이상 책이 우리의 미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요즘 대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며 때만 되면 늘어놓던 잔소리도 사라졌다.
한때 경쟁적으로 ‘북섹션’을 만들며 독서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들 신문의 현재 북섹션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일주일에 2~3개 면이 고작이다(는 7개 면, 은 5개 면이다). 혹시 이들은 알아버린 게 아닐까. 출판시장, 특히 인문·사회 분야(때로는 과학 분야도 포함해서)의 책은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책을 읽을수록 자신들의 적이 늘어나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책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마지막 보루요 요새가 아닐까. 이성보다 광기가 갑질을 하는 세상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인간 구실을 하려면 책을 붙들 수밖에 없다. 해마다 해오던 여름휴가철 책 특집을 소개하면서 너무 거창한 화두를 꺼낸 건 아닐지 쑥스럽다.
퇴계 이황은 장인에게서 1만 권의 책을 물려받은 아버지 이식 덕분에 어려서부터 책에 둘러싸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구양수의 삼다(다독·다작·다상량) 가운데 게걸스럽게 읽는 다독보다는 정독과 숙독을 더 중히 여겼다 한다. 무조건 ‘많이’ 읽기보다는 ‘잘’ 읽어야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얘기다.
불황이라고 해도 매주 내 책상에는 적게는 60~70권, 많게는 100여 권의 책이 쌓인다. 이 가운데 독자에게 소개할 만한 책은 10~20%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소개하는 11권의 책은 가 매주 골라낸 책 중에서도 지난 1년치를 통틀어 다시 골라낸 책들이다.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 정독 혹은 숙독해보시기 바란다. 당신이 광기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갈지 모를 때, 손 내밀어 잡을 수 있는 정신적 노끈이 되어줄 것이다.
이재성 문화부 책지성팀장 sa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승환, ‘구미 사태’ 후 공연 요청 줄이어…“7월까지 ‘헤븐’ 투어”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단독] ‘총선 전 계엄’ 윤석열 발언 당일 신원식, 김용현 불러 대책 논의
‘내란 비선’ 노상원 수첩에 정치인·언론인 ‘사살’ 표현 있었다
‘윤석열 버티기’ 상관없이…헌재, 탄핵심판 준비 착착
대만 전자산업노조 “삼성 반도체 경쟁력 부족은 근로시간 아닌 기업무능 탓”
이승환 “‘정치 언행 않겠다’ 서약 거부, 구미 공연 취소 통보 진짜 이유”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
[단독] “말 잘 듣는 장교들, 호남 빼고”…‘노상원 사조직’ 9월부터 포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