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여전히 국내 여름휴가 여행지 1순위로 꼽힌다. 청량한 빛깔의 바다와 시원한 공기를 내뿜는 한라산이 있는데다, 신비한 아우라를 내뿜는 이색적인 풍광을 제주 동서남북 어디서든 목격할 수 있으니 그 영예로운 1위 자리를 내내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제주는 휴가철마다 몸살을 앓는다. 국내 여행객뿐 아니라 이제는 중국·일본 등에서 온 국외 여행객들을 맞이하느라 여기저기 쑤신다. 개발주의자들은 들끓는다. 국외 여행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제주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좀더 개발을 해야 한다고 떠든다. 자본을 가진 이들과 먼 미래는 내다보지 못한 채 얄팍한 자본의 향기로운 유혹에 넘어간 이들이 만나 카지노 같은 시설이 제주에 우후죽순 늘어날 판이다.
1년에 한두 번 제주를 찾아 즐기기만 할 뿐인 육지 것(제주 사람들은 제주 바깥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육지 것’이라고 일컫는다)들은 수개월 만에 찾은 제주가 낯설고 당황스럽다. 애정해 마지않던 제주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발만 동동 구른다.
<font size="3">제주가 제주다울 수 있게 여행하는 방법</font>제주를 사랑하는 여행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제주가 제주답도록, 제주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여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떠오르는 열쇳말, ‘생태·문화 여행’이다. ‘생태여행’이나 ‘에코투어리즘’이라는 말이 더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제주는 생태적 가치를 지닌 곳일 뿐 아니라 제주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적 사건들이 어우러져 형성된 여행지다. 제주의 독특한 지질·지형과 더불어 제주 사람들의 마을 공동체, 4·3 항쟁 같은 굴곡진 역사까지 여행자들이 두루 살펴볼 만한 여행 자원이라는 이야기다.
제주의 생태여행은 국내 어느 지역보다 역사가 오래됐다. 2000년대 초부터 기존 주류 여행 방식에 문제의식을 갖고, 대안여행으로서의 생태여행 방식이 소개됐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기행에서 비롯돼 점차 본격적인 생태여행 방식을 안내하는 식으로 발전했다. 제주에 대안여행이 자리잡는 데 거름 역할을 한 곳은 ‘제주생태관광’이라는 자그마한 여행사다. 이름 그대로 여행자들이 생태여행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여행사다. 이 여행사가 진행한 한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해 생태여행의 일부를 맛보았다.
7월21일 오전 11시, 40여 명의 여행자들이 제주 조천읍 선흘1리 동백동산 습지보호지역 서쪽 입구에 섰다. 여행자들은 제주의 특이 지형과 더불어 4·3 항쟁의 아픔을 안고 있는 선흘1리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위해 여정을 시작했다. 동백동산 입구에 들어서자 가장 반기는 것은 모기였다. 동백동산은 곶자왈(용암 암괴가 뒤엉켜 있는 원시림) 숲에 자리잡고 있다. 제주에는 수많은 곶자왈이 있지만, 동백동산이 여행자를 끌어모으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동백동산 안에 습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육지에는 하천이 흐르는 곳이나 호수 주변 등에 습지가 생기지만, 제주에는 곶자왈 지역에 습기가 형성돼 있곤 한다. 습지와 곶자왈 곳곳의 물웅덩이에서 서식하는 모기들은 여행자 무리가 들어서자 잔치를 벌였을 테다.
고제량 제주생태여행 기획가는 여행자들을 동백동산 군데군데에서 세우며 여러 가지 설명을 곁들였다. 작은 물웅덩이 앞에 멈춰서서 그는 “이 물웅덩이가 영화 에서 한 사람이 물을 떠먹던 그 웅덩이”라고 말했다. 여정 내내 은 여러 차례 소개됐다. 이 영화는 4·3 항쟁 당시 제주 사람들이 어떻게 군인과 경찰을 피해 살았는지 또는 피해서 살다 어떻게 들켜 학살당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다큐멘터리영화다.
<font size="3">아이들 뛰놀기 좋은 천연 놀이터 ‘절물’</font>동백동산을 다 걷고 난 뒤 여행자들은 동굴 탐험에 나섰다. 선흘1리 마을 주민인 김양건씨가 손전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국도변을 따라 걷다 그는 그 옆 풀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대섭이굴이 나타났다. 4·3 당시 이 동굴에 수십 명의 제주 사람들이 피신해 있었다고 했다. 깊은 동굴 안은 에어컨을 튼 듯 시원했다. 마음속 서늘함도 함께 느껴졌다. 이 굴 안에 군인과 경찰이 언제 들이닥쳐 자신들을 죽일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야 했던 당시 제주 사람들이 떠올라서였다. 빛 없이 깜깜한 굴 안쪽에서 손전등마저 끄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왠지 모를 공포가 어깨를 감싸안는 듯했다. 그렇다고 제주의 생태여행이 이렇듯 제주의 아픈 역사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7월22일 오전 11시 제주시 명림로에 있는 절물자연휴양림을 찾았다. 이곳은 원시림과 인공림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휴양림의 초입에는 1960년대 말 조림한 삼나무숲이 눈길을 끈다. 인공림이다. 삼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어 노인이나 어린아이가 걷기에도 좋다. 유모차를 끌고 길을 걷는 가족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삼나무에서 뿜어져나오는 피톤치드 향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삼나무 인공림을 뒤로하고 위로 향하면 원시림을 느낄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두 달 전 절물오름으로 향하는 ‘너나들이길’(3km)이 여행자에게 열렸다. 숫마르 편백숲길을 따라가면 한라생태숲과 거친오름까지 갈 수 있다. 거친오름 주변에는 노루생태관찰원이 꾸며져 있다.
절물자연휴양림에는 유독 아이들이 많았다. 도시의 아이들은 1년에 서너 번 자연 속 체험을 하지만, 제주의 아이들은 매주 절물휴양림과 같은 곳을 찾는다. 제주시 한샘어린이집 어린이들과 동행한 숲해설가 정봉숙씨는 “절물은 인공림과 원시림이 함께 있다. 원시림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열매나 꽃이 다채롭다. 한라생태숲에 이르는 길은 오름을 경유하는 길이라 제주의 지형도 함께 익힐 수 있어 체험학습장으로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한라유치원의 어린이들과 함께 절물휴양림을 찾은 변카나리씨는 숲 속 놀이가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을 기르는 데 더없이 좋다고 강조한다. 그는 “숲 체험을 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성장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 원래 숲에서 노는 방법을 모르던 아이들이 나무로 집짓기도 해보고 나무에 그네를 걸어놓고 놀기도 한다”며 “어린이들이지만 절물휴양림 같은 곳뿐 아니라 오름이나 원시림도 거뜬하게 오른다”고 말했다.
절물휴양림에는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 오후 2시 두 차례 숲해설 프로그램이 개설된다. 2시간 동안 숲해설가와 절물휴양림 곳곳을 걷고 숲생태계를 익히며 새로운 각도에서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단체로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싶으면 인터넷(http://jeolmul.jeju.go.kr)을 통해 예약해야 한다. 인원이 1~2명인 경우 현장에서 신청할 수 있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9시에는 숲길 명상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제주의 생태여행지로 바다와 숲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깊고 맑은 계곡도 있다. ‘돈내코 유원지’는 제주에서 물이 마르지 않는 몇 안 되는 계곡 중 하나다. 제주의 한라산과 도심 주변의 계곡은 대부분 건천이다. 마른 천이라는 뜻이다. 용암이 굳어 형성된 현무암이 제주 전역에서 발견됐다. 현무암은 용암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순식간에 굳으면서 만들어진 돌이다. 이 때문에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현무암 지대를 거치고 나면 그 밑으로 물이 새어나가 지하수로 흘러든다. 제주의 계곡이나 천이 대부분 건천인 이유다.
<font size="3">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돈내코의 청량한 공기</font>이런 지질적 특징이 있는 제주도에 마르지 않는 계곡은 귀하고 귀하다. 돈내코는 그중에서도 한라산 중턱 깊은 곳에 자리잡아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돈내코 계곡으로 이르는 계단은 급경사다. 그만큼 한 걸음 내디딜수록 시원해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최근 비가 많이 내려 수량이 풍부해진 돈내코 계곡에 이르자 외마디를 지르게 된다. “무릉도원!”
크고 작은 바위가 곳곳에 자리잡았고, 그 사이 깊고 얕은 천연 수영장이 펼쳐진다. 계곡가에선 돗자리를 깔거나 너럭바위에 몸을 누인 여행자들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수다를 떨거나 졸음에 겨워 하품을 한다. 돈내코는 외지인보다는 제주 현지 주민들에게 더욱 친근한 피서지다. 여행자들은 제주를 찾으면 꼭 바닷가나 한라산 등을 코스에 넣곤 하지만, 한여름 돈내코만 한 여행지가 따로 없다.
놀기 좋은 계곡으로 들어서기 전 꼭 들러봐야 할 곳이 있다. 입구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원앙폭포’가 나온다. 작은 폭포지만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까지 시원해진다. 돈내코가 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는 이 원앙폭포 위로 지하수가 뿜어져나오는 용천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천지대 아래의 폭포수는 잠시 발가락이라도 담그면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설 정도로 차갑다. 이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수영을 즐기는 청년도 여럿이었다. 금세 입술이 파래져서 몸을 떨며 나왔지만.
최근에는 돈내코 유원지 주변으로 ‘석주명 나비길’이 새로 열렸다. 석주명 선생은 국내 토종 과학자로 평생 나비와 제주어를 연구했던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 나비 이름의 70%를 지었고, 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돈내코 주변 지역의 생태를 탐방하는 과학자가 여전히 많다고 영천동사무소 관계자는 전했다.
색다른 바다 생태를 체험하고 싶다면 제주시의 삼양검은모래해변 옆 큰갯물을 찾아가보자. 큰갯물은 돈내코와 마찬가지로 용천지대 때문에 생긴 곳이다. 제주에는 예로부터 한라산과 그 아래 중산간 지대에 비가 내리면 빗물이 지하로 흘러들어 바닷가의 용천지대로 뿜어져나오는 곳이 많았다. 이곳에서 제주 사람들은 빨래나 목욕을 하곤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골프장과 리조트 등이 건설되면서 용천수량이 줄어들었고, 예전만큼 깨끗한 용천수가 뿜어져나오는 곳이 많지 않다. 큰갯물은 용천수가 나오는 곳에 자리잡아 잘 보존되고 있는 노천탕 중 하나다. 용천수가 흘러나오는 곳에서 한 할머니는 방망이질을 탕탕 하며 아침나절 빨래에 여념이 없다. 빨래터 바깥으로는 돌담을 쌓아 깨끗한 담수에 몸을 담글 수 있게 했다. 빨래터로 내려가는 계단 오른쪽에 희미하게 적힌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탕’이라 쓰여 있다. 실제로 이곳이 목욕을 하는 장소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와도 같다. 이처럼 제주의 색다른 지형 곳곳에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녹아들어 있었다.
<font size="3">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으신가요?</font>제주에는 이 밖에도 들러볼 만한 생태여행지가 여럿이다. 우선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가운데는 쇠소깍, 사려니숲길, 한라생태숲이 있다. 한라생태숲에는 탐방안내소가 있어 해설사들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세계자연유산으로는 거문오름과 만장굴 등이 있다. 거문오름은 제주 조천읍 선흘2리에 있다. 이곳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뒤 마을 주민들의 주도로 엄격한 탐방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거문오름을 방문할 때는 꼭 해설사와 동행해야 하고, 미리 탐방 예약을 해야 한다.
제주의 특이한 지질을 살펴보는 여행을 하고 싶다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역을 찾아가보자. 수월봉 지질 트레일(비포장길·오솔길) 코스는 2011년부터 운영되고 있다. 수월봉 주변에는 화산 분출물이 쌓인 퇴적층과 퇴적층이 형성한 절벽 아래 바닷가가 이어진다. 무엇보다 수월봉은 제주에서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혀 해가 질 무렵 오르는 것이 좋다. 선흘 동백마을과 더불어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곳은 1100고지 습지와 물영아리 습지, 물장오리 습지가 있다. 람사르협약은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해 국제적으로 중요하거나 독특하고 희귀한 유형의 습지를 람사르 습지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1100고지 습지에는 민물성 늪과 식물이 있고, 멸종위기 조류와 식물, 한라산 자생식물인 한라물부추 등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제주=글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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