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면 중년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고달파진다. 그렇다. 나는 지금 40대에서 50대를 아우르는, 중년 남자 직장인들의 여름 사복 스타일이 좀 슬퍼서 이 글을 쓴다. 사복 스타일은 그렇다 치고, 그럼 군복, 아니… 출근복 스타일은?
사실 한국 중년 남자들의 슈트 스타일은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 격변 혹은 진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슈트에 관한 한 한국 중년 남자들은 지난 10여 년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네안데르탈인으로의 진화를 이뤄냈다. 언제 크로마뇽인이 되냐고? 흐음, 사실 크로마뇽인은 네안데르탈인과 전혀 다른 종족이기 때문에 크로마뇽인이 되기는 힘들다. 크로마뇽인은 일단 신체적 조건과 스타일의 역사 자체가 다르다. 이를테면, 이탈리아나 프랑스 남자들이 거기 속한다. 그러니 한국 중년 남자들의 목표는 ‘좀더 진화한 네안데르탈인’ 정도가 되면 딱 적절하다.
어쨌거나 요즘 40~50대 중년 직장인들은 슈트를 꽤 잘 입는다. 이건 아마도 10여 년 전부터 패션잡지들이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슈트 올바로 입는 법’ 등을 강의하고, 그것이 일간지의 주말 기획 기사나 칼럼 등으로 더욱 넓게 전파되고, 백화점의 중저가 슈트 브랜드들도 예전과는 다른 핏의 슈트를 내놓으면서 발현된 무의식적 진화일 것이다. ‘은갈치 슈트’는 거의 사라졌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은갈치 슈트를 여전히 입고 있다면, 당신은 지구에 오점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은갈치 슈트 따위가 왜 나쁜지 설명할 이유도 없다. 그건 그냥 나쁘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한국 중년 남자 직장인들의 여름 사복 스타일. 이것의 가장 큰 문제는 ‘젊어 보이려는 애꿎은 노력’이다. 여름이 오면 한겨레신문사 직원을 비롯해 꽤 많은 직장인이 주말 근무나, 혹은 주말 나들이를 할 때 ‘젊어 보이기 위해’ 입는 옷이 하나 있다. 티셔츠다.
티셔츠는 매우 쉽고 간단하게 스타일리시해 보일 수 있는 옷이다. 바로 그게 문제다. 한국 중년 직장인들은 평소 입던 슈트의 경직된 인상에서 벗어나보려는 마음에 화려한 원색이나 과감한 프린트가 찍혀 있는 티셔츠를 고른다. 그게 젊고 신선해 보이냐고? 그걸 입는 순간 그들은 홍익대 앞 클럽에 서른예닐곱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들어가려다 “아유, 형님 왜 이러세요”라는 기도의 빈정을 마주한 채 입구에서 쫓겨나는 슬픈 중년의 초상이 된다.
젊어 보이려는 노력이라는 건 종종 거의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나이에 맞는 세련됨을 갖추고, 나이에 맞는 섹시함을 되살리는 것이다. 어떻게?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그냥 하얀색을 고르면 된다. 라운드넥이든 브이넥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하얀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섹시했던 중년 남자 두 명인 스티브 매퀸과 말런 브랜도도 하얀 티셔츠를 입었다. 브래드 피트와 조지 클루니가 프린트가 찍힌 원색의 티셔츠를 입은 순간을 본 적이 있나?
하얀 티셔츠는 비어 있다. 이를테면 절제와 중용의 미학 같은 것이다. 절제와 중용은, 어린 남자들과 대결해서 완승을 거둘 수 있는 중년 남자들만의 비밀 무기다. 나이 든 남자는 비우고 또 비워야 진정으로 근사해진다. 원색의 프린트 티셔츠는 뭘 휘감아도 젊음 그대로 아름다운 20대와 30대 초반에게 양보하면 된다. 하얀 티셔츠를 입었다가 혹시 BYC나 TRY ‘난닝구’처럼 보이면 어쩌냐고? 솔직히 말할까? 차라리 BYC와 TRY의 하얀 난닝구가 당신이 올여름에 입기 위해서 지난달 유니클로에서 구입해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초록색 프린트 티셔츠보다 낫다. 진짜다.
김도훈 공동편집장*칼럼니스트 김경씨가 ‘리바이벌21’(제1001호)에서 이랬다. “내가 만약 편집장이라면 김도훈에게 패션 칼럼을 맡길 것 같다. …다시 한겨레신문사로 출근하게 된 그가 얼마 전 이렇게 투덜거리는 걸 들었다. ‘광대가 된 것 같아요. 여기선 아무도 저처럼 입지 않거든요. 아, 이 무기력하고 칙칙한 풍경이여.’”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은 김도훈 공동편집장의 ‘지금 뭐 입었어?’ 지적질을 받잡기로 했다. 3주에 한 번 연재된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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