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자 패션이라는 게 세상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스카프를 매는 남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스카프는 멋 좀 내고 싶은 남자들에게 꽤 유용한 아이템이다. 코트나 재킷 속에 그냥 축 늘어뜨려 매기만 해도 바깥으로 드러나는 센스가 엿보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스카프는 남자에게 허용되는 몇 안 되는 액세서리 중 하나다. 원래 불황에는 옷보다는 액세서리가 많이 팔린다. 옷을 새로 살 돈은 없으니 비교적 저렴한 액세서리라도 구입해서 스타일을 바꿔보려는 인간적 욕망 덕분이다.
자, 지금까지는 매체들이 남자의 스카프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하는 말들이다. 나도 오랫동안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줄기차게 스카프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기백만원짜리 코트를 매년 새로 구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같은 코트를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는 스카프에 주력했다. 빨간 스카프, 파란 스카프, 줄무늬 스카프, 엄청나게 사들였다.
그 결과? 엄청나다. 옷방의 분위기가 완벽하게 달라졌다. 버라이어티해졌다. 옷장 문을 열면 빨갛고 파랗고 줄무늬가 화려한 스카프가 색채의 방점을 찍었다. 마치 먼셀의 색상표를 현실에 구현해놓은 것 같았다. 그게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옷방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남자에게 왜 ‘옷방’이라는 게 따로 있기까지 하냐고 묻지는 마시라. 그 정도로 많은 옷을 사는 터라 이런 칼럼도 쓰고 있는 거다.)
그런데 거대한 함정이 하나 있었다. 옷방의 분위기는 점점 다양해지는데 내 스타일의 분위기는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사모은 스카프들을 도저히 매고 다닐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까 그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한국 남자가 가진, 스카프에 대한 묘한 저항감 때문이었다. 스카프란 머플러와는 또 다르다. 머플러가 둔탁하게 겨울의 바람을 막아주는 실용품에 가깝다면, 스카프는 좀더 패션 아이템에 가깝다. 추위를 막는 기능보다는 지루한 옷차림에 약간의 색채와 생기를 더해주는 기능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스카프는 머플러보다 화려하고, 프린트도 중성적이다.
그렇다. 화려하고 중성적이다. ‘함부로 매고 다니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스웨덴 브랜드 아워 레거시의 호랑이 무늬 스카프는 도저히 어디서도 맬 수가 없었다. 해외 출장을 가서 사온 벨기에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의 100% 실크 스카프는 너무 하늘하늘한 나머지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30년간 청담동에서 부티크를 해온 디자이너 선생님 같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만, 나는 스타일리시해 보이고 싶었지 패셔너블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패셔너블이라는 단어는 패션 빅팀(Fashion Victim)과 종이 한 장 차이고, 전자에서 후자로 빠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서 집에 온 엄마에게 나는 실크 스카프를 모조리 넘겼다. 대신 목은 조금 차갑게 유지하기로 했다. 혹은, 더 추워지는 순간 100% 울로 된 머플러를 매기로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굳이 실크로 된 스카프를 매고 싶다고 해도 나는 말릴 생각이 없다. 그건 당신이 스타일 앞에서 충분히 용감하다는 소리니까. 용감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라도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물론, 용감한 사람은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나는 실패했었다. 당신은 성공하길 바란다.
김도훈 편집장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3번째 ‘김건희 특검법’ 국회 법사위 소위 통과
패싱 당한 한동훈 “국민 눈높이 맞는 담화 기대, 반드시 그래야”
9살 손잡고 “떨어지면 편입”…‘대치동 그 학원’ 1800명 북새통
한동훈 또 패싱…추경호 “4일 대통령실 가서 순방 전 담화 건의”
국방부 “러 파병 북한군 1만명 넘어…다수 쿠르스크 등 전선 이동”
북-러 결탁 전, 러시아는 윤석열에게 경고했었다 [논썰]
11월 5일 한겨레 그림판
로제 ‘아파트’ 빌보드 글로벌 2주째 1위
세월호 갇힌 이들 구하다 상한 몸, 한국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니…
머리에 기계 심은 5살, 못 보고 못 씹어도…엄마 소원은 딱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