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잠에서 깨자마자 ‘송년 나의 스타일 모토는 딱 하나다, 윤리적 패션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날 바로 모토를 어겼다. 패딩을 꺼냈기 때문이다.
나는 재작년 겨울 처음으로 패딩을 구입했다. 딴에는 ‘스타일을 포기할 수 없다면 브랜드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어처구니없이 비장한 마음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손녀가 입어서 더욱 기세를 떨친 몽클레르의 패딩을 구입했다. 그나마 값비싼 딱지라도 어깻죽지에 붙어 있어야 덜 부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정말 하찮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다.
하여간 패딩은 따뜻했다. 그러나 패딩이 모피와 다름없이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이를테면 ‘윤리적 생산’을 표방하고 나선 대부분의 패딩 업체들이 사실은 푸아그라를 위해 평생을 학대받는 거위의 털을 뽑아서 패딩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이상 패딩을 입고 다니는 것 자체가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도 안다. 이게 지나치게 까탈스러운, 어쩌면 윤리적 소비를 위한 윤리적 소비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일단 사실을 알고 나니 거슬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모두에게 같은 양심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적어도 나의 알량한 양심에는 충분한 가책이 생겨버린 탓이다.
사실 윤리적인 패딩을 입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를테면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는 2014년부터 오로지 100% 추적이 가능한 ‘트레이서블 다운’만을 사용한다. 살아 있는 오리나 거위, 혹은 푸아그라 사육을 위해 강제로 사육한 거위로부터 깃털을 얻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국의 모든 패딩 시장을 휩쓸면서 거의 모든 한국 브랜드들이 디자인을 몰염치할 정도로 뻔뻔하게 카피하기 시작한 ‘캐나다 구스’ 역시 살아 있는 오리나 거위로부터 깃털을 뽑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캐나다 구스의 패딩에는 진짜 코요테의 털이 달려 있다는 거다. 이건 윤리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뭔가 뜨뜻미지근한 윤리적 태도라고 해야 할까.
그러다가 나는 드디어 윤리적 소비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심지어 패딩을 선택하지 않고, 우아한 코트를 입어도 괜찮은 방법을 말이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사과하는 자리에 입고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런저런 일간지들이 부끄러움 없이 기사로까지 만들어낸 로로피아나는 안데스산맥에 사는 비쿠냐(낙타과에 속하는 동물)의 털을 나무 덩굴을 이용해서 채취한다. 자유롭게 초원을 달리며 사는 비쿠냐가 나무 덩굴을 지나치는 순간 가지에 털이 묻는다. 로로피아나는 딱 그것만을 이용해서 스웨터 같은 의류를 만든다.
조현아 부사장이 입고 나온 그 코트가 로로피아나 것인지도 모르겠고, 비쿠냐의 털로 만든 코트인지도 모르겠다. 딱히 관심은 없다. 하지만 만약 그게 비슷하게 윤리적인 방식으로 채취한 동물의 털로 만든 로로피아나의 코트라면, 나는 그것을 적어도 동물윤리적으로는 충분히 공정한 사과용 복장이었다고 말하리라.
그래서 내가 송년을 맞이해 로로피아나의 코트를 구입할 생각이냐고? 일단 한번 매장에는 들러볼까 한다. 만약 송년 세일 중이라거나, 그게 정말 최대한 윤리적으로 만든 코트라면, 윤리적으로 럭셔리한 호사를 부려보는 것도 절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녀의 코트가 로로피아나의 코트였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거 다 추측일 따름이라니까.
김도훈 편집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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