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칭의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는 삼선을 신을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 여기서 삼선이란 여러분이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구두나 운동화를 벗고 데스크 밑에서 꺼내 신는 바로 그 삼선슬리퍼를 의미한다. 슬리퍼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그건 삼선‘쓰레빠’라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리는 물건이니까.
근데 어째서 매체 론칭의 가장 큰 의제 중 하나가 삼선슬리퍼였냐고? 요는 이렇다. 이 매체에는 전통적인 언론매체나 기업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절반쯤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업무 중에 구두를 벗고 맨발이나 양말 신은 발로 삼선슬리퍼를 신는다는 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가장 큰 문제는 미학적 문제다. 삼선슬리퍼는 예쁘지 않다. 그건 오로지 편리함과 의학적 가치(그러니까 무좀 방지…)를 위한 물건이다.
서울에서 가장 힙한 호텔 중 하나인 W호텔 이사 출신인 ‘라이프스타일 에디터’는 삼선슬리퍼를 사서 신겠다는 몇몇 남자 직원들의 요구에 치를 떨었다. 과장이 아니다. 그녀는 정말로 온몸을 부르르 흔들며 치를 떨었다. “그런 걸 신는다고? 사무실에서?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 뭐? 손님도 그걸 신고 만난다고?” 그녀의 얼굴근육 한 줄기 한 줄기가 비명을 질러댔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도 여기 직원들이 삼선슬리퍼를 신는 걸 원하지 않았다. 왜냐면 삼선슬리퍼는 무엇보다도 썩 보기 좋지 않고, 다들 똑같은 슬리퍼를 신은 모양새가 좀 우스울 뿐만 아니라, 그걸 신는 순간 어째 태도가 한없이 풀어져서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는 은퇴한 영감님처럼 행동하게 되는 탓이다. 예비군 군복은 희한한 물건이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나긋나긋하던 남자들마저 예비군 훈련을 위해 오랜 군복을 꺼내 입는 순간 바닥에 침을 찍찍 뱉고 만사를 귀찮아하는 말년 병장의 태도로 돌변한다. 삼선슬리퍼는 ‘사무실의 예비군 군복’이다.
편안함을 위해 삼선슬리퍼를 신어야 한다는 의견과, 아예 슬리퍼 따위는 사무실에서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가운데, 나는 합의점을 찾아냈다. 좀더 미학적으로 보기 좋은 슬리퍼를 사서 신는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어떤 종류의 슬리퍼가 좋을지 고민했다. 과학적·미학적으로 도출된 결론은 버켄스탁이다.
독일 기업인 버켄스탁의 슬리퍼는 밑창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코르크로 만들어져 있고, 끈은 가죽으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밑창 설계가 의료용 신발 수준이라 신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족저근막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편안하고 실용적이다. 게다가 삼선슬리퍼보다 2만~3만원 더 주면 인터넷으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삼선 슬리퍼보다 훨 단정하다.
지금 직원들은 버켄스탁을 신고 있다. 가죽의 색을 살린 갈색도 있고, 막상 신으면 놀랍도록 스타일리시한 흰색도 있다. 어떤 직원은 ‘이젠 버켄스탁도 올드하다!’며 요즘 가장 유행 중인 테바(Teva)의 샌들을 신는다. 버켄스탁과 테바는 심지어 슈트 차림에도 근사하게 어울린다. 나는 그들이 사무실로 찾아온 손님을 슬리퍼 차림으로 맞이하거나, 건물 지하의 식당에 슬리퍼를 신고 가도 꽤 그럴듯하다고 자찬한다.
삼선슬리퍼를 한번 버려보시라. 사무실은 편안해야 하는 공간이지만 집에서 동네 편의점으로 향하는 골목길이나 당신 아파트의 베란다만큼 편안해야 하는 공간은 아니다.
김도훈 공동편집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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