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직장은 자그마한 리서치 회사였다. 7개월쯤 다녔는데,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뭔 놈의 일 때문인지 야근이 많았다. 10명이 채 안 되는 직원 가운데 유독 집에 갈 생각은 않고, 야근은 기본에다 노상 밤샘을 하던 상사 한 명이 있었다. 정규 근무시간이 끝난 뒤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는 슬리퍼로 갈아신고, 연신 줄담배에다 1970년대 로큰롤을 들으며, 파워포인트 화면을 올려놓고 이런저런 제안서니 기획안을 궁리했다. 회식 뒤 노래방에선 주로 정태춘이나 송창식의 노래를 불렀는데 목청이 좋았다. 전반적으로 호감은 있었지만, 솔직히 좀 이해는 가지 않는 선배였다. 그게 십수 년이 지난 일인데…, 지난해엔가 어찌어찌 페이스북을 통해 그의 근황을 접했다. 서울 생활을 접고 충남 보령에 내려가 농산물 식품회사에서 일하는 모양인데, 사진이며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그렇지만 딱히 반가이 그 글을 읽을 맘이 들지는 않았다. 왠지 ‘도사’연하는 동여맨 머리 모양도 그렇고, 젊은 시절 사회의 큰 변혁을 꿈꾸던 이가 시골에 내려가 자연이니 생태니 사소한 일상의 위대함이니 하면서 글깨나 읽은 티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넋두리 삼아 토해내는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양철북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온 소식을 접했다. 시큰둥하며 책을 펼쳤는데 ‘쿵!’ 깜짝 놀랐다. 짧은 글 한편 한편 읽는 맛이 아쌀했다. 평균연령 일흔이 넘는 충남 보령 월전리 노인네들의 토박이 사투리며 그 속에 담긴 기가 막힌 비유를 온전히 살려내는 궁둥이품깨나 드는 작업도 놀라웠지만, 그들의 구술을 판소리를 듣는 듯 가락 실린 단단한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솜씨가 웬만한 기성 작가들보다 나았다. 한 토막 한 토막 쪽글들이 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손바닥문학’이라 당당히 불릴 만한 정제되고 품격 있는 문학작품이었다.
특히나 눈을 반짝이며 읽은 글은 전직 제비족, 고물상, 뻥튀기 아저씨, 돼지 잡는 칼잡이 등 사연 있는 인물들의 인생을 1인칭 구술로 풀어놓은 것이었는데, 예전 ‘뿌리깊은나무’에서 발간했던 전설적인 ‘민중자서전’ 시리즈의 압축판이라 할 만했다.
정말 다행스러웠던 건, 시골 노인네들의 입담으로 펼쳐내는 일상의 사소함이 그가 바라는 사회의 ‘거대한 변혁’보다 훨씬 더 위대하노라 사기 치지 않으려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장인어른의 입심 섞인 잔소리 한마디에 야코죽는 처가살이 머슴으로 자신을 눙치고 있지만, 새벽녘마다 ‘사소함’과 ‘위대함’ 사이를 오가는 삶의 무늬를 남다른 글쓰기로 새겨놓는 야근쟁이 옛 상사의 모습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남 차장님, 아니 덕현 선배, 글발 죽이네요. 노래 솜씨보다 훨 낫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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