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농담 같은 비명

세계의 묘비명
등록 2013-02-01 12:32 수정 2020-05-02 19:27

‘아이 윌 비 백.’
영화 속 터미네이터는 ‘돌아오겠다’던 유언을 지켰다. 1965년부터 21년여 동안 자신의 이름을 단 라디오 토크쇼를 진행했던 미국의 방송인 멀빈 그리핀이 가장 많이 읊은 대사는 “전하는 말씀 듣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이었단다. 등 유명 퀴즈쇼를 기획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던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단다. “이 말씀 전하고는 다시 못 돌아오겠다.”
묘비명 또는 비문을 뜻하는 영어 단어 ‘Epitaph’는 그리스어 ‘에피타피온’, 곧 ‘장례식에서 하는 연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고인에 관한 가벼운 농담을 전하는 게 그네들 장례식의 관례이듯, 세상을 향해 내놓는 마지막 발언까지 농담거리 삼은 이들이 제법 많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란 묘비명을 남긴 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대표적이다.
“이제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됐다. 창조주께서 날 만날 준비가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헝가리 출신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연구논문을 남긴 수학자’란 평가를 받는 에르되시 팔의 묘비명에는 “마침내 더는 멍청해지지 않을 수 있게 됐다”고 쓰여 있다. 희극배우 겸 작가인 스파이크 밀리건은 83살에 숨을 거두며, “내가 아프다고 했잖아”란 말을 비문에 새겼다.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말 탄 이여, 그저 지나쳐가라!”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마지막 시는 자신의 묘비명이었다. 죽는 날까지 ‘시심’을 잃지 않는 것은 작가의 숙명인 게다. 유명세 탓에 사후에 무덤이 도굴될까를 걱정했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이런 비문을 남겼다. “벗들이여 부탁하네. 제발 참아주게. 여기 묻힌 것은, 티끌도 파헤치지 말아주게. 무덤의 돌 하나 건드리지 않는 자에게 축복이, 내 뼈를 옮기려는 자에게 저주 있으리.”
생의 막바지까지 ‘꼿꼿함’을 놓지 않는 분들도 계신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묘비명으로 “미국 독립선언서의 집필자이자, 버지니아주 종교의 자유법을 제정했으며, 버지니아주립대의 설립자 여기 잠들다”라고 적었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비문에는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신께서 ‘뉴턴이 있으라’ 명하셨고, 이윽고 사방이 밝아졌다”고 적혀 있다. 영국 런던 외곽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묘비명은 벌써 130년째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