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제27회 스페인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남자핸드볼 대표팀 이상섭 감독은 대회 기간 내내 마음고생에 시달렸다.
대표팀이 충격의 연패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애초 한국은 24개국이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각 조 6팀 중 상위 4팀이 오르는 조별리그 통과를 자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세계랭킹 19위로 C조에 속한 한국은 세르비아(5위)와 폴란드(11위)는 물론이고 우리보다 세계랭킹이 낮은 슬로베니아(23위), 벨라루스(33위) 등 유럽 팀들에 모조리 졌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36위)에도 2골 차로 져 아시아 최강의 자존심마저 무너졌다.
남자핸드볼은 지난해 여름 런던올림픽에서 조별리그 5전 전패를 당한 데 이어 브라질과의 두 차례 평가전, 그리고 이번 대회 5연패까지 A매치에서 충격의 12연패를 당했다.
런던올림픽에서는 조별리그 6팀 가운데 상대 5팀이 모두 세계랭킹 10위 안에 드는 ‘죽음의 조’에 속해 어려운 경기를 펼쳤다.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선 비교적 대진운도 좋은 것으로 평가됐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그동안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 핸드볼계에서 한국 남자핸드볼은 비유럽 국가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였다. 1988 서울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따내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남자핸드볼의 은메달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남자 구기종목 가운데 역대 가장 좋은 올림픽 성적으로 남아 있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조별리그를 1위(4승1패)로 통과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비록 8강 토너먼트에서 스페인에 져 8위를 기록했지만 엄청난 유럽 팀들을 연파하고 거둔 조별리그 1위는 큰 ‘사건’으로 평가됐다. 2009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13위에 그쳤지만 조별리그에서 2승1무2패로 비교적 무난한 성적을 거뒀다. 이러다 보니 스페인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국제핸드볼연맹(IHF) 관계자들도 한국 팀의 추락에 대해 “이유가 뭐냐”며 궁금해했다.
가장 큰 원인은 최상의 전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선수 가운데 ‘월드스타’ 윤경신(40·두산 감독), 백전노장 백원철(37·웰컴론코로사), 지난해 코리아리그 최우수선수(MVP) 이재우(34·두산), 국내 최고의 점프력을 가진 ‘야생마’ 고경수(29·충남체육회), ‘포스트 윤경신’ 정수영(28·웰컴론코로사), ‘속공의 명수’ 유동근(28·인천도시개발공사) 등 무려 6명이 은퇴와 부상 등으로 빠졌다. 모두 주전급 선수다. 특히 윤경신·이재우·정수영 등 왼손잡이 3명이 빠지자 라이트백과 라이트윙 등 오른쪽 라인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은 따로 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달리 세계선수권대회는 별다른 장점이 없다 보니 일부 선수들이 참가를 기피했다는 것이다. 올림픽은 참가 자체가 큰 명예이고, 아시안게임은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이 주어지고, 아시아선수권대회는 조금만 노력해도 우승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지만 세계선수권대회는 8강도 대단한 성적이지만 그나마 국내에선 별로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핸드볼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번 대회에 나오지 못한 선수 중에 정말 부상 때문인지 의심스러운 선수도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들도 훈련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해 이상섭 감독의 애를 태웠다. 이 감독은 “걸핏하면 아파서 훈련을 못하겠다는 선수가 하루에도 몇 명씩 나왔다. 2개월 동안 훈련하며 16명 모든 선수가 참여해 손발을 맞춰본 것은 딱 이틀뿐이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태원 SK 회장이 대한핸드볼협회장을 맡은 뒤 핸드볼이 비인기 종목에서 인기 종목으로 발돋움하고, 선수들 연봉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 때문에 인기 구기종목 선수들 사이에서 만연한 “국가대표 경기에 나섰다가 다치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이 핸드볼 선수들한테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핸드볼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상섭 감독은 “내가 국가대표 시절에는 주전이 되려고 아파도 숨기고 뛰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라며 아쉬워했다.
동기부여 없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무기력했다. 패기와 정신력은 실종됐고, 깊은 패배의식에 빠져들었다. 반면 유럽 팀들은 키 2m 이상인 선수가 팀당 3~5명씩 포진한데다 엄청난 파워로 한국을 괴롭혔다. 더욱이 장신 선수들은 스피드까지 갖추면서 한국의 장점이 사라졌다. “유럽 팀은 세계랭킹 3위나 30위나 실력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력 차이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세대 교체 가능성 보았다그래도 희망은 있다. 우선 핸드볼협회가 적극적으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협회 관계자는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훈련수당과 별도로 출전수당과 승리수당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대 교체의 성공 가능성도 보였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단 신예들이 값진 경험을 쌓았다. 태극마크를 처음 단 김동철(24·충남체육회)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유럽을 넘어설 수 있는 전략·전술 면에서도 지도자들이 지혜를 짜내고 있다. 이번 대회 결승전까지 모두 참관하고 돌아온 임규하 핸드볼협회 기술이사는 “1988 서울올림픽에서 우리가 은메달을 딸 수 있던 원동력은 조직력과 스피드,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었다”며 “이 세 가지는 한국 남자핸드볼이 여전히 유럽을 정복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고 말했다.
사라고사·과달라하라(스페인)=글·사진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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