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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바보 아빠의 옥중 만화편지

등록 2013-01-25 18:45 수정 2020-05-03 04:27

“그래서 마침내 돌아갈 날이 온다면 아빠의 남은 인생은 혜연이 너와 네 엄마에게 헌신하고 못다 한 일들을 마무리하고 마감하는 것이 아빠의 간절한 소망이다. 그 소망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사랑한다. 내 딸 혜연아! 너도 아빠를 위해 기도해다오. 혜연아! 정말 사랑한다. 아빠.”

김재호씨의 은 기성작가의 만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구성과 그림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재호씨가 딸에게 보낸 실제 편지들(오른쪽). 서해문집 제공

김재호씨의 은 기성작가의 만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구성과 그림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재호씨가 딸에게 보낸 실제 편지들(오른쪽). 서해문집 제공

딸바보 아빠의 살가운 편지. 다감한 아빠의 마음이 애절하다. 그 애절함은 사랑하는 딸과 그리운 아내를 만날 수 없다는 현실에서 흘러나왔다. 쉰일곱 나이에도 처자식을 제일로 아는 아빠 김재호씨는 옥중에서 이 편지를 썼다. 1984년부터 서울 용산에 터를 잡고 평범한 금은방을 운영하던 그는 늦둥이로 본 외동딸 혜연이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평범한 아빠였다. 그런 그가 2009년 1월19일 용산구 한강대로변의 남일당 망루에 올랐다. 2007년 시작된 용산 도시정비사업으로 정들었던 가게가 부당하게 철거될 위기에 놓이자 어쩔 수 없이 오른 망루였다.

딸 생일에 맞춰 출소하는 이에게 전달

예전처럼 장사를 하고, 그저 세 식구 지금처럼만 살기 바랐던 그의 소박한 꿈은 경찰특공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박살이 났다. 그 꿈과 더불어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의 목숨도 사라졌다. 권력은 살아남은 그를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그는 그렇게 구속됐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빠와 생이별한 아홉 살 딸은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아빠는 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글로는 어루만질 수 없는 마음의 상처였다.

“어리니까 단순해서 편지로 마음을 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글로 써 보내면 지루해서 읽다 말더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만화로 그려 보내면 기억에 남을까 해서 보냈는데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한번은 방 청소도 하고 엄마를 도왔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만화로 그려 보냈는 데, 얼마 뒤 아내가 접견 와서 하는 말이 아이가 달라졌 다는 거예요. 결과가 바로 나타나니까 이거다 싶었죠.”

아빠가 생전 그려보지 않았던 만화로 편지를 쓴 이유 였다. ‘공안사범’으로 4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된 아빠는 서울구치소, 공주교도소에서 이 만화를 그렸다. 그렇게 수감 생활 3년9개월 동안 노트에 그린 만화편지 400통 이 쌓였다. 김재호의 (서해문집 펴냄)은 그 편지들을 묶은 만화책이다.

변변한 도구조차 없는 척박하고 제한된 장소에서 그 림을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어렵게 복사 지를 구해 한칸 한칸 직접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딸을 위해 향기 나는 펜까지 구해 색칠했다. 딸의 생일에 맞춰 출소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맡겨 밖으로 보내기도 했고, 편지 검열이 심해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솜씨가 좋았던 아 빠가 보낸 만화편지에는 감옥에서 겪은 다양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가족의 소식을 듣고, 때로는 추억을 바탕으 로 상상해서 그린 가족 모두의 이야기, 딸에게 들려주고 픈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용산 참사 4주기가 지났지만 달라진 건 없다. 구속자 를 사면하고 진상을 규명하라는 유족들의 애절한 외침 에 정부는 오늘도 답이 없다. 대형 빌딩을 세우려면 한시 가 급하다며, 살아 있는 사람들을 저승으로 매정하게 떠 민 남일당 터는 지금 주차장이 돼 있다.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해 왜 그렇게 밀어붙였나. 지난해 10월 출소한 뒤 줄곧 딸의 손을 잡고 잠을 잔다는 딸바보 아 빠를 테러리스트라 부른 자들은 누구인가.

착한 가장을 잡아 가둔 야만의 시대

상처받은 한 가족의 지난 세월을 따뜻하면서도 애잔 하게 그려낸 이 책은, 그 어떤 목소리보다 아프게 용산 참사의 진정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징역이 형벌이 아 니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형벌’이었다고 말하는 착한 가장을 잡아 가둔 야만의 시대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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