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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한 진보보다 따뜻한 진보를

등록 2013-01-22 17:11 수정 2020-05-03 04:27

흔히 멋진 사람을 표현할 때 ‘쿨하다’고 한다. ‘쿨’(Cool)이란 단어의 원래 의미 때문인지 몰라도 서늘함·도도함의 느낌이 묻어난다. 그래서 쿨한 사람에게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비해 따뜻함은 서로 밀착하고 부대끼는 삶 속에서 느껴지는 온기다.
그동안 진보의 이미지는 따뜻함보다 쿨함에 가까웠다. 진보를 대표하는 인물들 중에는 학식과 교양은 물론 문화적 감수성까지 갖춘 쿨한 인물이 제법 많다. 그래서 ‘강남좌파’는 진보 성향 중산층의 모순을 드러내기보다 많은 이들이 닮고 싶어 하는 워너비로 자리잡았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낮은 곳에 야권은 없었다

보수 대 진보의 한판 대결로 치러진 이번 대선에서 진보의 전략은 ‘쿨함’을 유지하는 쪽에 가까웠다. 땀냄새 나는 시장보다 근사한 광장을, 일상이 숨 쉬는 지역보다 언론에 비친 이미지를 중시했다. 광장에는 젊은 세대의 ‘멘토’들이 대거 출동했고, 진보 성향의 대중도 환호하며 모여들었다. 문화적 자유로움과 젊음의 에너지가 가득한 광장의 경험은 흥겹고 모인 이들을 고양시킨다.

반면 새누리당은 시장으로, 동네로 향했다. 박근혜 후보가 방문하는 날엔 조직 담당자들이 미리 시장에 가서 상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떠날 때는 그 지역 시장 상인들의 물건을 한가득 팔아주었다고 한다. 근사하고 쿨한 광장에 비하면 시장과 동네는 소박하고 누추하다. 하지만 서민들의 땀냄새가 밴 일상의 공간이고 우리가 매일 숨 쉬고 발디디며 살아가는 공간이다. 이와 달리 광장은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공간이다.

대선이 끝난 뒤 여러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그 핵심에는 민주통합당이 있다. 민주당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이유는 중앙당이라는 두뇌도, 지역 조직이라는 중추신경도 무너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지역조직을 떠올리면 어둡고 폐쇄적이고 은밀한 뒷거래가 이뤄지는 공간이 연상된다. 그래서 2004년 국회는 정당 개혁이라는 명분하에 지구당을 폐지했다. 호남 지역당에서 탈피하려던 열린우리당도 적극 동참했다. 그런데 지역의 풀뿌리 조직이 사라지자 정치인들이 국민의 일상적 삶과 만날 수 있는 통로도 사라졌다.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서울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언론에 많이 노출될수록 정치인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야권에서 이런 경향이 강했고 그 결과 대중의 삶과 밀착한 정치는 점점 실종돼갔다.

대선 패배의 원인으로 세대 전략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2030세대에 의존하다 보니 중·장년층이 소외돼 똘똘 뭉쳤다는 것이다. 실제 야권은 2030세대가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 SNS 의존도가 높았다. 반면 50대 이상 중·장년층과 접속할 수 있는 통로는 없었다. 그들 중 다수는 지역을 기반으로 자영업을 하는 서민이다. 이들이 소외감을 느낄 때, 정치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의아해할 때 야권은 지상의 낮은 곳에 없었고 공중으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그 자리는 촘촘한 중추신경과 막강한 네트워크를 지닌 새누리당의 차지가 되었다.

광장보다 시장에서 미래를

대선에서 진보는 쿨했지만 정작 일상의 땀 냄새에서 배어나오는 따뜻함, 온기는 없었다. 따뜻함은 보수의 몫이었다. 일상에서는 지역을 매개로 한 따뜻한 손길이 더 위력적이다. 대선이라는 이벤트는 5년에 한 번 돌아오지만 대중은 매일매일 지역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멘붕’에서 조금씩 헤어나오기 시작한 많은 이들이 풀뿌리에서 시작하자고 이야기한다. 기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는 주장이다. 누추하지만 땀냄새 나는 일상에서, 광장보다 시장에서 대중의 삶과 밀착하며 온기를 전해주는 진보, 따뜻한 진보를 소망해본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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