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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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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적도 허락하지 않는 삶

등록 2013-01-11 13:43 수정 2020-05-03 04:27

춥고 추웠던 날 영화 을 보았다. 적고 보니 이상하다. 올겨울 춥지 않았던 날도 있었나. 나는 의 원작을 읽은 적이 없다. 내가 읽은 것은 동화 이 전부다. 동화 은 도둑질을 하려던 장발장에게 기꺼이 남은 은촛대마저 내준 신부의 자비와 그 자비가 도둑 장발장을 훌륭한 시민 장발장으로 바꾸었다는 내용이 주요 줄거리였다. 혁명 이야기가 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없었거나 자비에 의한 인간의 교화만을 부각해 재구성한 동화였거나 혁명이 뭔지 모르는 나이라 읽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장발장의 새 삶이 노동자의 것이었다면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러므로 영화 은 내가 비교적 원작에 가까운 형태로 접한 최초의 이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울음을 쏟아낼 만큼 웅장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영화의 어떤 지점이 못 견디게 불편했다.

우선 불편한 건 마리우스였다. 귀족의 자녀로 혁명의 선두에 섰다가 살아남아 사랑하는 여인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청년 마리우스를 보며 박완서 선생의 에 나오는, 가난을 체험하려 들었던 부잣집 남자 주인공이 생각났다.

결국은 착한 자본가로 거듭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장발장의 모습도 불편했다. 장발장의 선의를 오해하는 건 아니지만, 장발장을 최초로 각성시키고 새로운 삶에의 의지를 불어넣은 것이 위대한 자비에서 비롯됐음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 자비만으로 장발장의 위대하고 인간적인 새로운 삶이 가능했다고 보아도 좋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위조된 신분으로 그가 얻은 새 삶이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노동자의 삶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체가 탄로돼 애써 찾은 새로운 삶에서 내몰려 버림받은 아이 코제트까지 데리고 도망자가 된 장발장이 코제트를 위해 그 옛날처럼 다시 빵을 훔쳐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인간에 대한 긍휼과 구원, 선의와 자비에 의한 각성을 내가 너무 폄하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나는 사기꾼 부모에게 태어나 길러진 여관집 딸 에포닌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끝내 어떤 기적도 허락하지 않는 삶. 몇 번의 기적과 몇 번의 구원이 있는 삶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결국 에포닌의 삶과 같을 것이다. 기적도 없고, 출구도 없고, 허술하기 그지없는 바리케이드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해야 할까. 그 답을 모르겠어서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자꾸 눈물이 난다.

한 해의 마지막을 며칠 남기고 해고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 앞으로 청구된 손해배상액이 158억원이라고 했다. 그들의 삶이 왜 그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렸는지는 누구도 답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망가진 삶에 대한 보상액이 얼마인지도 듣지 못했다.

중산층 공약 지키지 말았으면

대선주자로서 박근혜 당선인은 70%의 중산층을 약속했다. 나는 그 공약의 실현 가능성보다 그 공약이 정말 실현된다면 나머지 30%의 삶은 어떻게 존재할지가 더 궁금하다. 70%의 중산층에 30%의 상류층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중 적게는 1%, 많게는 5%만 상류층이라면 20%를 웃도는 나머지는 중산층에도 들지 못하는 빈민일 것이다. 70%가 그저 그만한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시대의 빈민층은 얼마나 춥고 배고플까. 70%의 커트라인에 들어가기 위해 삶의 경쟁은 얼마나 치열해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선인이 70%의 중산층 만들기라는 공약을 지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은 누구에게나 개별적인 것이지 통합적으로 산술할 수 없는 것이다. 평균을 내어 보편적으로 행복한 삶이 아니라 소외되거나 내몰린 삶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공약의 방향을 바꾸어주기를, 그리하여 더 이상 누구도 벼랑 끝에서 제 삶을 내던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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