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부모님 중에는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여전히 철인 같은 체력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주말마다 모두 텃밭에 가신다는 것. 그런 부모를 둔 친구들의 증언(?)은 늘 경이롭다.
평일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주말에만 가는 텃밭인데 최소 1시간은 운전해야 갈 수 있는 거리다. 작은 텃밭을 둔 내 입장에서는 텃밭이라기보다 농사에 가까운 몇백 평 규모를 경작하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면 수확량이 킬로그램(㎏)이 아니라 톤(t) 단위로는 나올 거란다. 자급도 하고 일가친척에 이웃까지 먹이고도 몇 박스가 남아 자식 차에 실어주는 부지런함, 넉넉함. 모두 ‘효놈’으로 불리는 우리에게 없는 에너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구들이 부모님 댁에 다녀올 때마다 몇 상자씩 실어오는 채소의 양은 하루 식사가 대부분 외식으로 굴러가는 도시의 자식들에게는 번뇌의 크기로 작용한다. 언제까지 이 먹거리를 받아올 수 있을까 하는 감사함과 뭉클함, 그리고 ‘이걸 해 먹을 시간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 처리하지?!’ 하는 복잡한 심경.
부패해 끈적끈적해진 채소를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집어넣으며 이 아까운 걸 다 어떡하냐며 하소연하던 친구들 중 몇몇은 이제 부모님 댁에 다녀오는 길에 전화로 ‘에스오에스’(SOS)를 친다. 그렇게 하지감자 한 상자와 오이와 가지 큰 봉지, 양배추 몇 통, 종류별로 차곡차곡 정리된 상추 같은 게 종종 집으로 배달됐다.
뭘 주든 감사히 받아먹는 자의 올해 결실은 배추와 김장 김치로 정점을 찍었다. 제1535호 농사꾼들에 적었듯 올해 배추는 60포기 중 서너 포기만 가까스로 생존했는데, 그마저도 생육이 더뎌 국 몇 번 끓여 먹으면 끝나는 정도의 수확이었다. 전국적으로 배추 대란을 겪은 터라 늘 주문해 먹던 김치마저 생산량이 줄어 ‘무한 대기’를 타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본가에 다녀온 친구가 배추 열 포기를 집으로 배달해준다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배달해준 부모님의 배추는 내 배추와는 존재감부터 다르다. 속도 꽉 찼을 뿐 아니라 양손으로 공손하게 들어야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와 무게감이었으니! 마침 농민들에게서 얻은 고춧가루도 많고 여기저기서 얻은 속 재료도 있으니 천일염만 사다 절여 있는 재료로 김장을 담갔다. 김장에 적당한 대야가 없어 빨래 바구니를 박박 씻고 분갈이 매트 위에 김장비닐을 까는 등 머리를 써야 했지만, 덕분에 냉장고 털듯 집 안의 채소를 싹싹 다지고 갈아 넣어 흐뭇한 갈무리를 했다.
집에 김치냉장고가 없어 발코니에 쌓아뒀더니 3주 만에 맛이 들었다. 친구들을 불러 김치찜을 내놓으니, 친구는 양손 무겁게 들고 온 커다란 장바구니에서 올해 김장, 묵은지, 섞박지 통을 꺼내 안겨준다. 솔직히 자식으로서는 매년 배추에 고추, 쪽파, 무 같은 속 재료까지 손수 키워 김장하느라 목 디스크 수술한 부모님을 생각하면 잘 먹어야 하지만, 김치냉장고에도 더 이상 남는 자리가 없다며. 겨우 한 통 비워냈더니 다시 가득 찬 네 통이 쌓이는 김치 마법이라니. 다음에는 친구들과 이 김치로 만두를 함께 빚어 먹어야지. 올겨울 김치 하나로만 풍족한 밥상을 차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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