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자작나무 숲은 어디에 있을까. 산짐승들이 모여들어 눈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잠드는 자작나무 숲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쌓인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 또다시 눈이 내리고…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흰 뱀으로 변해 자작나무 기둥을 타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눈. 겨울밤 자작나무 숲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소리가 무서워 문고리를 걸고 등잔불을 밝히던 아이가 살던 골짜기 외딴집은 영영 사라진 걸까.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백화’, 백석)
마흔이 한참 넘어서야 백석의 이 시를 읽고 나는 무릎을 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 까닭은 그동안 내가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세계가 이 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의적으로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슬프고 서러웠다. 모두가 등잔불을 백열전구로 교체했고 나무를 때던 아궁이를 메워 기름보일러로 바꿨다. 밤이면 산짐승 울음소리로 가득하던 골짜기는 텔레비전에서 쏟아져나오는 소리들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나는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례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의 세계와 등을 돌렸다. 그뿐인가. ‘아배가 밤참 국수를 받으러 가면 나는 큰마니의 돋보기를 쓰고 앉어 개 짖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의 세계와 작별했다. 또 있다.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늬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어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는 세계를 떠나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대관령 골짜기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했던 내 유년의 눈 내리는 자작나무 숲을 내다버린 것이다.
눈이 내리면 나는 대관령 골짜기 골짜기의 자작나무 숲을 찾아다닌다. 눈 덮인 자작나무 숲에서 기다린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옛날의 초가집으로 들어가 등잔불을 밝히고 풍요로웠던 한 세계를 불러오려고 눈을 감는다. 따스한 구들장으로 함박눈이 쌓이고 멀리서 여우가 캥캥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마 나의 다음 소설은 겨울 자작나무 숲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로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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