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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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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랑을 위한 노래

1차 세계대전 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사랑과 치유를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담아낸 헤밍웨이의 걸작 <태양은 다시 뜬다>
등록 2012-01-14 02:22 수정 2020-05-02 19:26

한 남자가 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허리 아래를 다친 파리 주재 미국 특파원 제이크. 그는 약혼자가 있는 영국 귀족 브렛 애슐리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얻지 못한다. 자신의 성적 장애와 그녀의 분방함에 그는 그저 브렛의 곁을 서성인다. 브렛은 그런 제이크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다른 남자와의 연애를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지치고 힘들 때, 그의 어깨에 기댈 뿐.

선정 100대 영문소설

제이크는 미국 프린스턴대학 출신 소설가 로버트 콘과 파리 시내 곳곳의 술집과 카페들을 부유한다. 그 수많은 카페들에서 페르노, 압생트, 브랜디 등의 술을 마시며 브렛의 새 남자친구들을 마주하는 일에 지쳐갈 무렵, 제이크는 콘, 또 다른 그의 친구 빌 고튼과 함께 스페인 팜플로나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브렛도 약혼자 마이클 켐벨과 여행에 합류한다. 자발적인 엑스팻(Expatriate·고국이탈자)들의 스페인 여행은 브렛이 콘과 밀월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갈등을 맞는다. 그러던 중 브렛이 제이크의 소개로 만난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 사랑에 빠지고, 이를 질투한 콘이 제이크와 빌, 로메로를 구타하자 여행은 엉망이 돼버린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1926년작 (한겨레출판 펴냄)는 파리와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여자를 둘러싼 네 젊은 남자의 사랑과 방황을 건조한 문체로 그린 작품이다. 직전의 스페인 여행에서 겪었던 체험을 밑줄기로 첫 장편을 쓴 27살의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평단의 극찬과 대중의 호응을 함께 받으며 단박에 문단의 기린아가 됐다. 훗날 선정 100대 영문소설, 선정 세계 100대 명저, 모던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100대 영어소설로 꼽힌 이 소설의 이름값을 높여준 것은 헤밍웨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머리말로 삼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말은 1차 대전 이후 방황하던 세대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스페인의 산페르민 투우 축제와 도시 팜플로나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이 소설의 유명세에 크게 빚졌다.

파리에서 생활하는 제이크가 투우 축제와 낚시를 즐기러 팜플로나로 가는 여행기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은 한 편의 순례기로도 읽힌다. 이들의 여정이 산티아고 순례길과 포개지는 까닭이다. 번역자 이한중씨의 해설처럼 이 작품을 ‘순례 모티브’로 비추어보면 많은 것들이 순례자의 간절한 마음과 겹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빙산이론’의 단문체 돋보여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 야전의무대에 지원해 구급차를 운전하던 시절의 헤밍웨이.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 야전의무대에 지원해 구급차를 운전하던 시절의 헤밍웨이.

줄거리와 더불어 눈길을 잡아끄는 부분은 헤밍웨이의 문체다. 제이크를 포함해 상처받은 이들이 주고받는 냉소적이고 지적인 대화를 헤밍웨이는 스타카토 같은 단문에 실어나른다. 작가는 사태를 부연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형용사와 부사를 뺀 문장은 기름기없이 담박하다. 가히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의 한 원형이라 할 만하다. 고등학교 졸업 뒤 곧바로 기자 생활을 했던 헤밍웨이의 이력이 그의 문장에 오롯한 까닭이다. 훗날 ‘빙산이론’ 또는 ‘생략이론’이라고 표현되는 헤밍웨이식 단문은 이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 “작가는 자신이 잘 아는 부분에 대해 생략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할 경우, 독자는 작가가 표현을 한 것 이상으로 강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전의 헤밍웨이는 말했다. 1983년 는 “간결하면서 견고하고, 탄탄한 문체로 말하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는 멋 부리는 글쓰기를 부끄럽게 만든다”고 평했다.

친절한 번역자주는 수면 아래 가려진 빙산의 모습을 알려준다. 제이크의 처지를 빗대는 시적 비유와 작품 전반에 숨겨놓은 은유는 상세한 각주 덕분에 어림잡을 수 있다. 특히 1920년대의 달러 화폐가치를 환산해 일러주거나, 당시의 버스를 검색해서 설명하는 대목은 문장과 문장의 큰 간극을 메우며 감정이입을 거든다.

한편 제이크가 친구와 파리의 거리를 산책하고 카페에서 술을 마실 때, 문득 회사를 때려치우고 파리로 떠난 소설가 고종석이 오버랩된다. 제이크와 고종석 모두 자발적 고국이탈자란 점에서, 둘 다 파리를 자신의 유흥 근거지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자라는 직업과 연을 맺었다는 점에서 둘은 묘하게 닮았다.

멀고 먼 여행길은 치유의 순례길

소설은 여행의 파국을 맞았던 브렛과 제이크가 마드리드에서 해후한 뒤, 서로에게 기대 택시를 타고 드라이브를 가는 것으로 끝난다. 늘 그랬듯 제이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게 우애의 어깨를 빌려준다.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이라고 소설은 노래하는 것만 같다. 이미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는, 다만 작가의 인용구로 위안을 삼을 따름이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건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다시 뜨고 지며, 뜬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멀고 먼 여행길이 치유의 순례길인 것은 오로지 그 사랑 때문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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