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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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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를 성난 얼굴로 돌아보다

세계적 불황을 초래한 ‘폭탄 돌리기 게임의 역사’… 미국 금융위기의 발생 원인을 따져물은 <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
등록 2011-10-21 11:11 수정 2020-05-03 04:26

“월가를 점령하라”라는 구호가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넘어 세계의 거리 곳곳을 메우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분노에서 시작된 월가 시위는 이제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확산될 조짐이다. 1%의 부자가 아니라면 99%의 우리 모두 그들의 구호에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미국 경제지 에서 10년 이상 경제·금융 관련 보도를 해온 베서니 맥린과 조 노세라가 월스트리트 시위의 시발점이 된 미국 경제위기의 뒷이야기를 파헤쳤다. 이들이 취재한 미국 금융시장은 이기와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가운데 화려한 성장에서 황폐한 위기로 곤두박질쳤다. (자음과모음 펴냄)란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에 나오는 “지옥은 텅 비었고, 모든 악마들이 여기에 있도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30년 전 재앙을 쓰다

‘아메리칸드림=내 집 마련’이란 공식이 뿌리 깊던 미국 사회에서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산을 소유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국민의 주택 소유를 촉진하는 정책을 폈고, 주택 대출 이자를 공제해주거나 장기 대출을 해주는 등의 제도를 실시해왔다. 어떤 정당에 속해 있든 이 정책에 대해서는 아무도 감히 비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금융기관의 처지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받아야 한다는 데 대한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 금융시장의 거두 셋이 모여 부담을 떨쳐낼 궁리를 한다. 저자 맥린과 노세라는 여기서부터 금융 재앙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시간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증권사 살로몬브러더스에서 모기지 채권 부서를 이끌던 루이스 라니에리, 그리고 세계적 자산운용사 블랙록을 설립한 래리 핑크, 연방주택저당채권공사의 최고경영자(CEO)이던 데이비드 맥스웰이란 세 남자가 ‘주택저당채권 담보부증권’(MBS)이라는 금융상품을 만든다. MBS는 금융기관이 주택을 담보로 주택 구매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대출채권을 대상 자산으로 해서 발행한 증권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A은행이 주택 구매자 B에게 집을 담보로 20~30년간 돈을 빌려주고 주택에 근저당이 설정된 대출채권을 유동화중개회사 C에게 팔고, C는 이를 담보로 MBS라는 상품을 발행해 자본시장의 투자자 D에게 파는 식이다. D가 상품을 사면서 현금화하면 이 돈은 은행 A에 지급된다.

은행은 장기간에 걸쳐 상환을 기다리지 않고 금고를 채워 다시 대출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고, 주택 구입자는 집값의 20~30%의 자본만 갖고도 ‘내 집’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상품이 여러 단계를 거쳐 판매되면서 각각의 회사들은 일정 부분의 수익을 얻는다. MBS 개발자 세 사람은 이토록 이상적인 금융상품이 있을까 감탄했을 것이다. 이들은 MBS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란 확신도 가졌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상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재앙, 그러니까 금융계의 구조적 위험이 대두되거나, 서브프라임 산업이 급성장하거나, 대출자와 대출기관의 연결고리가 모호해져 생길 금융위기 등은 예상하지 못했다. 30여 년이 흐르고, 금융위기로 미국이 휘청인 다음에야 MBS를 만들었던 라니에리는 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역사상 가장 큰 폭탄 돌리기 게임을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자책한다.

MBS가 생기기 전 미국 내 주택담보대출은 대출하는 자와 받는 자가 1:1로 연결되는 단순한 관계도를 그렸다. 은행과 저축대부조합이 고객이 저축 계좌에 맡긴 돈이 금고에 저장되면 이 돈을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증권화 덕분에 저축계좌에 자금을 유치하지 않아도 고객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새 대출기관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주택담보대출기관은 두 부류였다. 첫째는 신용도가 높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대출채권을 파는 기관이었고, 둘째는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게 고금리 단기대출을 제공하는 기관이었다. 신용도가 낮은 사람이 받은 주택담보대출은 ‘서브프라임’(비우량) 등급이 붙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지만 실은 신용도가 높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든 아니든 간에 모두 함정에 빠졌다. 엄격한 대출 기준을 중시하는 듯했지만, 월스트리트의 금융사들은 시장점유율을 높이려고 무분별하게 대출을 늘렸던 것이다.

욕망으로 폭탄을 발화하다

금융사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학자금 대출, 자동차 대출 등에 대해서도 MBS와 유사한 상품을 만들고 세상의 모든 대출을 증권화할 것처럼 달려들었다. 더불어 투자자들의 관심을 유도하려고 주택담보 대출채권을 리스크별로 나누고 재포장해 팔았다. 여기에 부동산 담보대출은 무분별한 파생상품과 결합하며 위험성을 눈덩이처럼 불려갔다. 금융사들은 시장분석에 통계의 오류가 나타나도, 아슬아슬한 투자기법에 베팅을 하면서도 눈앞의 탐욕에 목매며 머잖아 다가올 미래를 수수방관했다. 국민의 ‘내 집을 갖고 싶다’는 꿈과 욕망에 기대 정부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고, 주택 구매자들은 자신의 능력치와 상관없이 일단 돈을 빌리고 보았다. 폭탄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질 시한에 임박한 채 넘겨졌고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저자들은 ‘금융위기가 왜 발생했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춰 일관되게 금융위기를 둘러싼 진실과 음모를 생생히 그린다. 관계자 인터뷰와 증언,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 논문, 금융위기 이후 쏟아진 관련 저작들을 바탕으로 꼼꼼히 자료 조사를 하고 여기에 내러티브를 가미했다. 책장을 펼치면 마치 잘 쓰인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금융사와 투자자, 주택 구매자의 욕망이 뒤엉킨 채 희비극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99%의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잔인한 현실이다. 상처는 빨리 아물고 희망은 오래 지속되면 좋겠는데, 모두들 미국에서 폭발해온 지구를 시커멓게 뒤덮은 경제위기의 검은 구름이 쉬이 걷히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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