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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몬스터의 편에서

피터 몰리뉴의 <던전 키퍼>
등록 2010-11-17 16:31 수정 2020-05-03 04:26

피터 몰리뉴는 근작 시리즈로 많이 알려진 디자이너다. 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삶의 여정 전체를 담아내는 독특한 게임이다. 뿐 아니라, 그가 만든 게임들 대부분은 넘치는 개성과 아이디어로 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는 게이머를 게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의 지위에 올려놓은 이른바 ‘신 게임’의 효시였다. 신 게임의 한 유형이긴 하지만, 는 게이머가 기르는 ‘토템’을 중심으로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가 창조해낸 또 다른 보물 가 있다.

<던전 키퍼>

<던전 키퍼>

는 1997년 첫 시리즈가 발매되었으며, 1999년에는 그 속편 격인 가 발표되었다(이 글에서는 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겠다). 장르를 따지자면 와 같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던전에서 기거하는 몬스터를 여기에서는 비스트라 부른다. 물론 초콜릿 복근을 자랑하는 훈남 캐릭터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WOW)의 ‘호드’와 비교해도 미모가 떨어지는 비호감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이 비스트들은 인간 캐릭터인 영웅들과 적대관계에 있다. 땅속에 있는 금을 두고 경쟁하는 탓이다. 아무튼 독특하게도 이 게임에서 게이머는 ‘인간’의 편이 아니라, 몬스터의 입장에 서서 인간을 무찔러야 한다.

게이머는 우선 임프라고 불리는 작은 몬스터들을 고용해 던전을 넓히며 금을 캐야 한다. 던전을 넓히고 자원을 모아 다양한 시설을 갖추다 보면 다른 다양한 몬스터들이 들어온다. 도서관을 지으면 마법사가 나타나고, 감옥과 고문시설을 갖추면 미스트리스가 들어온다. 도박장을 지으면 살라맨더라는 공룡 캐릭터가 등장한다. 에서 게이머는 가스와 미네랄을 자원으로 유닛을 ‘생산’한다. 하지만 의 게이머는 캐릭터를 모셔와야 한다. 더구나 이 캐릭터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항상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게이머는 캐릭터들에게 ‘급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이때가 되면 모든 유닛은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일단 돈부터 챙기러 간다. 물론 급료를 챙기는 데 열심인 만큼 일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종종 혼을 내거나 달래주지 않으면 바라는 대로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

에서 임요환이 보여주었던 신기의 컨트롤은 에서는 쓸모가 없다. 비록 유치한 수준의 인공지능(AI)이라고는 해도 이들은 오직 자신의 욕망과 의지 그리고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므로 미스트리스는 고문할 포로가 없을 때 자신을 고문하다 죽어버리고, 마법사는 실험과 연구에 몰두할 뿐 좀처럼 싸움에 나서지 않으며, 최강 캐릭터인 혼드리퍼는 아무리 급해도 길고 지루한 등장 세리머니가 끝나지 않는 한 할 일에 임하지 않는다.

지금 다시 플레이해봐도 의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은 전례를 찾기 힘든 다양하고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다. 임프, 마법사, 살라맨더, 미스트리스, 혼드리퍼를 비롯한 이 게임의 모든 유닛은 게이머의 손안에 있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뚜렷한 자기주장을 갖는다. 이후 많은 게임들이 더 정교해진 AI와 더 세련된 게임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지만, 아직 이만한 개성과 놀라움을 보여주는 게임이 또 있을까 싶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작품들 덕분에 여전히 게임은 해볼 만한 것일지 모른다.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교수·언론광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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