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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 모두의 정서가 깃든 천진한 언어 놀이, 이제니의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등록 2010-11-10 14:24 수정 2020-05-03 04:26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프리카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나 거제도에 살다가 2008년에 시인이 되어 얼마 전 첫 시집을 낸 이제니 시인은 ‘분홍 설탕 코끼리’나 ‘독일 사탕 개미’ 같은 것들로 시를 씁니다. 알다시피 영어에는 ‘childish’(유치한)와 ‘childlike’(천진한)가 구별되는데, 시인에게 이 구별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 시인은 후자에 속하는데 그건 일차적으로 그녀의 언어 감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시인입니다. 화가는 색을, 음악가는 음을,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죠. 그럴 때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동의하지 않을 분도 있을 겁니다. 어른은 할 수 없는 놀이를 하는 아이를 어른이 구경할 때처럼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 모습이 아무리 신기하고 귀여워도 제 자식 아닌 다음에야 그걸 1분 이상 지켜볼 어른은 많지 않을 테지요. 그러고는 외로운 할아버지처럼 소리치겠죠. 네가 시인이라면, 이제 그만 놀고 시를 쓰란 말이야! 놀이만으로는 부족하다면, 이건 어떨까요. 다시 천천히 읽어보시면 이 놀이 안에는 남녀노소 모두의 것인 어떤 정서가 고여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 할아버지와 손녀는 얼마든지 함께 울 수 있죠.

예컨대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페루’), 혹은 “막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랑받는 느낌도 없었다. 친한 사람들끼리 그러듯 막 대해줘도 좋을 텐데”(‘분홍 설탕 코끼리’), 혹은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내 잘못이 아니어도 요롱요롱 용서를 구하고 싶다”(‘요롱이는 말한다’)라고 말할 때 이런 정서들은 우리 모두의 것이죠. 대화가 헛돈다는 느낌, 예의 바른 태도가 때론 쓸쓸하다는 느낌, 잘못도 없이 용서를 빌고 싶은 느낌.

이 시인은 대체로 천진하다가 이런 식으로 기척도 없이 문득 어른의 표정을 짓습니다. 아이에게서 그런 표정을 읽을 때 우리가 ‘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듯이, 이런 구절들과 만날 때면 이 시인의 천진함마저 어쩐지 심오해집니다. 여기가 이 시집의 포인트 중 하나. 이 시인은 어른의 세계를 아이의 방식으로 말하는구나, 그래서 ‘아이는 할 수 없는 놀이를 하는 어른을 아이가 구경할 때처럼’ 이상하고 쓸쓸한 것이구나.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도 좋겠지만, 아직도 미심쩍다는 분들이 계실까봐 한 편 더 옮겨 적습니다.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이라는 시의 도입부입니다. 반성이 많아지는 연애는 사람을 지치게 하죠. 그래서 ‘나’는 결심합니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러고는 결심을 이렇게 이행합니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이 근사한 이별의 시에는 어떤 변명도 유보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들을 다 쓸모없게 만드는 아름다운 시. 20세기 이후의 난해한 현대시들을 꼼꼼히 분석한 뒤에 후고 프리드리히는 그의 책을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들을 수 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시 속에서, 진부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 독자가 아니라 혼돈과 공허를 향해 발언하는, 냉혹한 사랑을 알아볼 것이다.”() 이제니의 시는 난해하지도 냉혹하지도 않지만, 그러면서도 진부해지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천진합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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