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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을 얻은 자 복이 있나니

월드컵 특수 맞아 밀려드는 주문… 응원전만큼이나 치열한 축구팬들의 치킨 쟁탈기
등록 2010-06-23 21:14 수정 2020-05-03 04:26
많은 축구팬들이 한 프랜차이즈 치킨전문점에서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많은 축구팬들이 한 프랜차이즈 치킨전문점에서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기름기 좔좔 흐르는 몸에 양념까지 끼얹으시고 식욕을 자극하는 향수까지 뿌리셨다. 거룩한 향기만 맡아도 침이 주르륵~. ‘치느님’ 아니 치킨이 2010 남아공 월드컵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월드컵은 치킨 대학살의 장’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엔 치킨 소비량이 천정부지로 솟구친다. 그러다 보니 한국전을 보며 치킨 먹는 일이 쉽지 않다. 바야흐로 ‘월드컵은 치킨 전쟁’이다. “그리스전 보며 ‘치맥’(치킨과 맥주)을 먹은 이는 선택받은 자”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다.

헐~ 7시에 시킨 닭 9시가 지나도 안 와요!
헐~ 7시에 시킨 닭 9시가 지나도 안 와요!

헐~ 7시에 시킨 닭 9시가 지나도 안 와요!

월드컵 치킨 전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이트는 디시인사이드 치킨갤러리와 이글루스. 이곳엔 치킨 배달 성공기와 실패기, 치킨 메뉴 선택의 좋은 예와 나쁜 예 등 치킨에 관한 각종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지구상 최고의 조합인 치킨과 맥주 ‘치맥’을 경배하는 이들의 소리가 부부젤라(남아공의 전통 응원 도구) 소리만큼 온라인에서 요란하다.

6월11일, 한국과 그리스 경기가 펼쳐지기 하루 전날. 치킨갤러리엔 그리스전을 보며 먹을 치킨 메뉴 선택을 위한 정보 공유가 활발했다. “파닭은 역시 네네.” “맘스터치는 뭐가 맛있나요?” “BBQ와 교촌 중 어디가 낫나요?” “이마트 치킨은 별론가요?” 하지만 성공적인 메뉴 선택을 위한 고민만 떠다닐 뿐, 다음날 벌어질 치킨 배달 대란을 예상하는 이들은 없었다. “역시 응원엔 치맥”이라며 “치느님은 아름답지요, 경배합니다”라는 소리만 가득했다.

한국 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엔 치킨 소비량이 천정부지로 솟구친다. 6월17일 대목을 맞아 ‘반마리 주문은 받지 않는다.’고 써붙인 한 치킨전문점 모습.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한국 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엔 치킨 소비량이 천정부지로 솟구친다. 6월17일 대목을 맞아 ‘반마리 주문은 받지 않는다.’고 써붙인 한 치킨전문점 모습.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6월12일, 한국과 그리스 경기 당일. 오후 6시를 지나면서 심상찮은 기운이 흘러넘쳤다. “겨우 치킨집 통화했더니 2~3시간 뒤에 배달된단다, 헐.” “진짜 오토바이 소리 끊이지 않는데 우리 집만 안 오네.” “114 폭주, 치킨 1시간째 안 와서 전화하니까 불통임ㅋㅋ.” “축구는 시작했고, 치킨은 안 오고….” “치킨 대란 속에 누가 한 줄기 빛으로 배달 온 치킨 인증 좀 해봐라.”

전반전이 끝나가도록 치킨 없이 물만 먹은 이는 동영상 인증샷을 올렸다. ‘오후 7시에 시킨 닭이 9시가 되도록 안 왔다’는 제목 아래 뜨는 영상엔 방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물 2잔과 박지성이 한 골을 넣은 상황인 TV 속 경기 장면, 그리고 시계가 차례대로 비춰진다. 배달을 기다리다 지친 이들은 “통닭집에 달려가 직접 받아왔다” “전화하다 포기하고 냉동실에 얼려 있던 닭봉 꺼내 해동하는 중”이란 글도 올렸다. 주문한 메뉴와 다른 메뉴를 받아도 웃어넘겨야 하는 분위기였다. 경기가 끝나도록 치킨을 먹지 못한 이들의 분노는 기어이 폭발했다. “경기 끝난 뒤 온 치킨이 무슨 의미냐”며 배달원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이가 많았다.

치맥을 향한 경배와 분노로 온탕과 냉탕을 오가던 손님들과 달리 월드컵 특수를 맞은 치킨집 주인들은 어땠을까. 경기 분당 서현에서 비메이커 치킨집을 하는 박민선씨는 “전화기 3대에 불이 날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였다고 했다. 홀과 주문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하루 종일 밥도 굶고, 화장실도 한 번밖에 가지 못했다. 장사 8개월째, 이렇게 바쁜 날은 없었다. 하루 매출 정산을 해본 남편이 “4년 뒤 월드컵 때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축구선수도 아니면서 결의를 다질 때, “그때도 닭을 튀기라는 거냐”며 소리를 빽 지를 만큼 그는 지쳐 있었다. 월드컵을 위해 6개월 할부로 산 프로젝션 TV 값을 하루에 다 뽑았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웃을 수 있었다.

디시인사이드 치킨갤러리를 보면 월드컵이 ‘치킨 전쟁’임을 느끼게 된다. 디시인사이드 캡처

디시인사이드 치킨갤러리를 보면 월드컵이 ‘치킨 전쟁’임을 느끼게 된다. 디시인사이드 캡처

전쟁 같은 하루, 그래도 매출은 300% 신장

웃는 자가 있으면 우는 자도 있는 법. 월드컵 응원한다고 알바생이 도망가 하루 장사를 망친 치킨집, 원하는 시간에 배달을 안 해줬다는 항의로 단골손님 다 떨어지고 욕만 먹었다는 치킨집 사장들의 푸념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배달의 기수’인 치킨집 알바생에게도 6월12일은 끔찍한 하루였다. “3분 동안 주문전표가 5줄이 넘어갔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를 안 받는 것밖에 답이 없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니 직접 와서 시킨다. 5시간 동안 튀김기 두 대로 170마리 팔았다. 진짜 장난 아님. 니네 월드컵 때 치킨, 피자 먹지 마라.”(아이디 DD)

전쟁 같은 주말 뒤엔 평화가 왔다. 가맹점포들의 매출 동향을 살펴본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BBQ 홍보팀 이병진 과장은 “가맹점포의 매출을 종합해본 결과 평균 170~300% 매출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네네치킨 김현희 홍보팀장 역시 “평일보다 30% 이상 매출이 올랐다”고 했다. 이병진 과장은 경기 시간이 치맥 피크 타임인 토요일 저녁 8시 이후라는 점, 비가 와 거리응원전 대신 집에서의 응원을 택한 이가 많았다는 점을 매출 신장의 요인으로 꼽았다.

그리스전에서 월드컵 특수를 실감한 업체들은 바삐 6월17일 아르헨티나전을 준비했다. 평소보다 많은 닭고기 물량을 확보하는 한편, 그리스전의 혼란을 교훈 삼아 전략을 세웠다. 분당 서현 치킨집 박민선 사장은 “알바생과 주방 아주머니 1일 채용, 하루 전 재료 밑손질 끝내기, 예약전화 서비스 따위를 준비했다”고 했다. 치킨쥼 서울 신공덕점 사장도 “홀 손님은 일절 받지 않고 배달에만 집중”하는 차별화 전략을 택했다. 이를 위해 오토바이도 한 대 늘렸다.

아르헨티나전 결전을 앞둔 치킨집 점주처럼 손님들의 자세도 달라졌다. 치킨갤러리에는 ‘월드컵 경기를 보며 치맥을 즐길 수 있는 각종 팁’이 올라와 있다. “점심 전 선주문, 마트에서 치킨 사기, 집에서 튀겨 먹기, 치킨집에서 직접 가져오기, 주문 뒤 2시간 정도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기” 등 경험을 바탕으로 치맥과 함께하는 월드컵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월드컵 때 꼭 치킨을 먹어야 하느냐”며 ‘삼소’(삼겹살과 소주), 족발, 피자 같은 다른 대체품을 찾겠다는 포기자도 있다.

초복에 먹을 닭 남아 있나요?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치킨 때문에 대한민국이 16강에 오르는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경기 두 번 치러도 ‘치킨 대란’이 오는데 대한민국이 16강에 올라가면 대한민국 닭의 씨가 마르겠다”는 어떤 이의 농담은 웃고 넘겨도 등골이 싸하다. “초복용 삼계탕 닭이 벌써 풀려 복날에 먹을 닭이 없다”는 불확실한 소문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BBQ 이병진 과장은 “6월23일 열릴 나이지리아전은 새벽 3시30분에 경기가 열려 치킨 수요가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국내 최대 닭고기 업체인 하림 홍보팀 김대식 팀장도 “월드컵이 갑자기 열린 경기가 아닌 만큼 치킨용 육계 물량을 충분히 준비해왔다”며 “그리스전 때 물량은 지난해보다 10% 늘었지만 복날 때에 비하면 적은 물량”이라고 소문을 일축했다. 치킨용과 삼계탕용 닭은 품종이 아예 다른 만큼 월드컵 때 많이 먹어도 복날에 먹을 닭은 충분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여전히 “‘치느님’은 아름답지요, 경배합시다”이다.



아르헨티나전에선 달라질까 했더니
‘은총의 땅’이 다시 ‘분노의 땅’으로

한국과 아르헨티나 경기가 있던 6월17일 낮 1시. 저녁 8시30분 경기 시작에 맞춰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치킨을 먹기 위해 서둘러 치킨 예약 주문을 했다. 회사에서 5분 거리인 치킨쥼 신공덕점이다. 3분 정도 통화를 했을까. 그사이에도 상대편 수화기에선 대기 전화가 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후 6시.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축구를 보겠다는 기자들이 저녁까지 굶어가며 마감에 박차를 가했다. 오늘만큼은 ‘월드컵 경기 보며 치킨 먹는 선택받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으스대고 싶어 디시인사이드 치킨갤러리에 들어갔다. 그리스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읽혔다. “지금 시키니 30분 걸린다고 하네요.” “치킨 벌써 왔음. 일단 먹고 경기 때 맞춰 또 시켜야겠네.” “평상시보다 빨리 오는 건 뭐야?” 더 이상의 치킨 배달 대란은 없을 거라는 듯 치킨갤러리는 선택받은 자들로 ‘은총의 땅’이 돼 있었다.
저녁 8시. 예정된 시간에 치킨은 오지 않았다. 치킨쥼은 전화가 되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된 8시40분쯤에야 겨우 치킨이 도착했다. 배달원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경기 결과는 4-1로 아르헨티나의 승리. 대한민국 16강 진출에 적신호가 켜졌다. 경기 뒤 치킨갤러리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그리스전과 비슷한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은총의 땅’은 ‘분노의 땅’이 돼 있었다. “치킨 시킨 지 3시간 됐다. 치킨집 전화도 안 받네.” “정신적 피해로 손해배상 가능한 거지?” “골 들어갔는데 치킨도 못 먹는 더러운 인생.”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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