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는 사람들의 욕망을 담아낸 음식이다.”
한국방송 다큐멘터리 를 만든 이욱정 PD의 말이다. 기원전 3천 년 전 중국에서 시작된 국수가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과정을 짚으며 여행을 다닌 그는 국수가 “인류의 욕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식 중 하나”라고 했다. “빨리 만들어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서, 어느 지역이나 어느 식문화에 떨어져도 백지처럼 흡수돼 새롭게 태어나는 음식”이라는 게 덧붙인 설명이다.
북쪽은 메밀, 남쪽은 밀가루
중국에서 시작된 국수는 인접한 국가들에 영향을 주며 아시아의 부엌을 이어갔다. 우리나라에 국수가 들어온 것은 송나라 때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고려 승려들에 의해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1123)에 처음으로 면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는 게 그 방증이다.
국수는 우리의 식문화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각 지역에서 나는 재료와 특색 있는 조리법을 이용해 다양한 국수가 만들어졌다. 전국 팔도에 국수문화가 없는 지역이 없을 정도다. 국수 재료는 그 지역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지역에서나 가장 흔한 건 메밀이었다.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랐다.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경상도 지역에서는 이 메밀을 이용해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메밀묵, 메밀국수, 메밀전병, 메밀부침 따위다. 유학자 이시명의 부인 안동 장씨가 쓴 요리책 (1670)은 메밀을 으뜸가는 국수 재료로 소개한다. 장씨는 이 책에서 “메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반죽한 후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고 썼다.
춥고 척박한 땅을 가진 북쪽 지방이 칡·옥수수·메밀을 주로 사용해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면, 남쪽 지방에선 밀가루와 전분을 섞어 국수 요리를 즐겼다. 민물고기가 많은 충청도에서는 생선국수를, 경북 안동이나 전북 익산 같은 내륙지방에선 콩이나 팥을 이용해 국수를 해먹었다. 모양도 맛도 천차만별, 지방에 따라 국수가 만들어지고 유명해진 사연도 제각각이다.
국수의 종류가 다양해진 건 이북 사람들의 영향이 크다. 한국전쟁은 비극이었지만 팔도에서 다양한 국수문화가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면·육수·고명의 삼박자
실향민은 전쟁 뒤 경기·강원·부산 등의 지역으로 흩어져 새로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북에서 먹던 국수를 다시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시작은 꿈에서도 잊지 못한 고향의 맛을 다시 만드는 ‘옛 맛의 재현’이었다. 특히 국수문화가 발달한 경기·강원·경상도에서는 이북식 국수로 가업을 잇는 집이 많다. 경기도 양평 옥천냉면은 황해도에서 냉면집을 하던 이가 내려와 처음 문을 열었다. 평안냉면과 함흥냉면은 동네마다 있는 냉면집이 됐다. 경기도 여주 천서리막국수나 강원도 고성 동치미막국수도 메밀국수에 동치미 국물을 말아먹는 이북 방식 그대로다. 부산 밀면도 냉면을 먹고 싶은 실향민이 그 시절 흔하던 밀가루로 대신 면을 뽑아 만들어낸 음식이다. 옛 맛의 재현은 곧 ‘새 맛의 발견’이 됐다.
북쪽의 국수 문화가 끼친 영향 중 대표적인 게 면을 뽑는 방법이다. 그전 남쪽에서는 칼을 사용하는 칼국수가 대표적이었는데, 실향민이 내려와 면을 눌러서 뽑는 착면법을 전파시켜 다양한 면 요리가 가능해졌다. 같은 메밀로 만들어도 조리법에 따라 냉면·막국수·칼국수 등 다양한 굵기와 크기의 면 요리가 탄생했다.
국수는 면뿐만 아니라 육수도 중요하다. 이북에선 냉면 육수로 동치미 국물과 꿩·쇠고기를 삶아낸 육수를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꿩고기를 구하기 어려운 남한에서는 소·닭·돼지를 이용해 육수를 냈다. 밀가루도 없어 칡·메밀·옥수수로 해먹던 강원도에서는 멸치로 육수를 내는 건 사치였다. 대신 멀겋게 끓인 된장국에 국수를 말아먹었다. 콧등치기국수다. 경북 안동에서는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로, 바닷가 지역에서는 바지락으로 육수를 내 먹었다.
잘 뽑은 면과 육수에는 늘 김가루, 다진 김치, 달걀지단, 누른 고기 등의 고명이 올라갔다. 육수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맛을 살리는 첨가물이었다. 국수는 그렇게 면과 육수, 고명의 삼박자가 맞아야 맛있는 국수로 탄생했다.
추억하고 싶어서 찾는 국수
‘모든 음식은 기억으로 먹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북이 고향인 아버지를 따라 이욱정 PD는 평안냉면을 하는 서울 우래옥을 자주 다녔다고 했다. 그의 어릴 적 기억 속에는 만주에서 살던 할머니가 들려준 냉면 이야기도 있다. 할머니는 뜨거운 온돌방에서 먹던 얼음 동동 띄운 냉면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윤정진 한식요리사는 국수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만들어준 시원한 열무국수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국수라고 기억했다.
사람들은 추억하고 싶어서, 또는 친근해서 국수를 찾았다. 겨울밤 뜨거운 온돌에 앉아 먹는 시원한 동치미막국수는 별미였고, 보릿고개 시절 배를 채울 수 있도록 국수의 흔한 재료가 돼준 메밀은 하늘의 선물이었다. 국수가 3천 년을 이어온 인간의 욕망을 담아낸 음식이라는 말은 전국 팔도에서 국수를 치대고 뽑고 삶았던 시간을 따라가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국수 한 그릇에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보인다. ‘대한민국 누들로드’를 그려보는 이유다.
먼저 경기도와 강원도의 특색있는 국수들을 맛보고, 다음호에서는 충청·호남·영남과 제주도의 국수를 찾아간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참고 문헌: (김학민) (한국관광공사) (한국방송 누들로드팀, 이욱정) (김항아)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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