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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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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좋아요, 국물이 끝내줘요

삼삼한 육수가 돋보이는 경기도…

실향민이 만드는 냉면, 깔끔한 천서리막국수, 시원한 바지락칼국수
등록 2010-06-04 02:09 수정 2020-05-03 04:26
바지락칼국수.

바지락칼국수.

한반도의 면식 문화는 3천 년의 국수 역사를 가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중국과 맞닿은 이북지방에선 평양이나 함흥뿐만 아니라 냉면 없는 고장이 없다고 할 만큼 지역마다 다양한 국수를 즐겼다. 냉면도 국수라고 부르며 즐기던 이북 사람들에게 국수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음식이었다.

옥천냉면, 황해도의 맛 그대로

실향민은 새롭게 뿌리내린 지역의 식재료와 조리법을 이용해 고향에서 먹던 국수 맛을 재현했다. 평안도의 평양냉면과 함경도의 함흥냉면이 서울에서 터를 잡는 사이 황해도식 냉면은 경기 양평 옥천면에서 실향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40년 전통 옥천냉면집의 사장 이인숙씨는 “황해도에서 냉면집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1952년에 옥천으로 피난 와 냉면집을 낸 뒤 이 일대에 옥천냉면집이 하나둘 늘어나 마을을 형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황해도식 옥천냉면은 쇠고기 국물에 닭이나 꿩, 돼지 육수를 섞는 평양식 냉면과 달리 돼지고기로만 국물을 낸다. 3대째 옥천냉면집을 하고 있는 이 집도 처음 할아버지가 재현한 옛 맛 그대로 대를 이어가고 있다. 평양냉면보다 달짝지근한 육수는 삼삼하면서 감칠맛이 난다. 이인숙씨는 “지명에 내천(川)자가 들어간 곳은 물이 좋다는데 옥천 지역의 좋은 물로 담근 간장이 육수 맛을 살려준다”고 했다.

천서리 봉진막국수(위), 옥천 물냉면(아래).

천서리 봉진막국수(위), 옥천 물냉면(아래).

면은 메밀가루와 고구마전분을 섞어 뽑는다. 쫄면처럼 두툼하나 질기지 않다. 매콤한 함흥냉면에 견주면 옥천식 비빔냉면의 매운맛은 혀가 조금 알알할 정도로 그친다. 심심한 것 같지만 메밀의 맛을 침범하지 않는 은은한 양념 맛이 적당하다. 평안도나 함경도 냉면과 비슷하면서 다른 맛을 내는 게 황해도식 냉면, 옥천냉면이다.

서울 사람들이 강원도를 여행할 때 들르는 길목이던 경기 여주 천서리엔 강원도의 맛을 닮은 천서리막국수가 있다. 평북 강계가 고향인 강진형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메밀묵 장사를 하다 이곳으로 옮겨 1975년에 막국수 장사를 시작했다. 고향 지명과 아들 이름을 따 강계봉진막국수라고 가게 이름을 지었다. 향년 85살로 재작년에 별세한 그를 대신해 아들 강봉진(40)씨가 가게를 맡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면을 뽑았다”는 그는 군 제대 뒤 본격적으로 가업을 물려받을 결심으로 일을 배웠다고 했다. 지금은 어머니 유영필(70)씨와 함께 옛 맛을 이어간다.

대를 이어 성업 중인 가게엔 공개하지 않는 음식 비법이 있다. 천서리막국수 역시 동치미 국물이 국수 맛의 90%를 좌우한다. 지하수로 담근 동치미는 땅에 묻은 빨간 ‘고무 다라이’에서 숙성시켜 국물로 사용한다. 시원하고 깔끔한 국물 맛에 방해될까봐 국수 고명으로 흔히 나오는 김가루도 쓰지 않는다. 국물 맛에 반한 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가게를 드나드니 날마다 두 다라이의 동치미가 뚝딱 사라진다. 비빔막국수는 청양고추를 이용한 다진 양념을 써 매큼하다. 물을 먹어도 진정되지 않는 혀의 얼얼함은 쇠고기 사골과 양지, 황태를 끓여낸 육수가 달래준다. 기름기 없이 깔끔한 육수를 내는 방법은 비밀이다.

중국산 식재료, 음식문화를 흔들다

강원도 춘천·봉평·고성처럼 여주 천서리막국수가 유명해진 이유에 대해 강 사장은 근처 군부대 영향이었다고 설명한다. “대중음식점이 별로 없고 군대에서 먹지 못하는 별미다 보니 군인 손님이 많았어요. 군인은 직업상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니까 이들의 입소문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군인 외에도 천서리막국수에 반한 이들은 실향민이다. 면의 식감이나 동치미 국물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귀신같이 알아냈다. 옛 맛을 변함없이 지키는 일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장사하는 강 사장의 숙제다. “원주에서 수확한 메밀가루를 사용하는데 값싼 중국산 메밀에 밀려 메밀 농사를 짓는 곳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요. 우리 밀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우리 밀을 써야 맛이 나는데 말이죠.”

값싼 중국산 식재료의 유입은 이미 향토 음식문화를 흔들고 있다. 해당 지역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를 이용해 맛을 내던 국수도 예외가 아니다.

갯벌이 풍부해 조개류가 많이 나는 서해안에서는 바지락을 이용해 칼국수를 끓였다. 지금은 어느 집에서나 흔하게 해먹는 바지락칼국수다. 특히 경기 안산·화성의 대부도와 제부도에 가면 집에서 먹던 방식대로 바지락을 푸짐하게 넣어 끓이는 바지락칼국수를 파는 상가들이 마을을 형성해 성업 중이다. 물길 끊어지는 시간을 알고 가야 하는 제부도보다 지금은 연륙도가 된 대부도가 더 손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다.

대부도에선 바지락칼국수를 대야만 한 그릇에 푸짐하게 끓여 내온다. 각자 자기 양만큼 국자로 퍼서 먹는데, 여느 칼국숫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방식은 대부도에서 유행시킨 것이라고 한다. 별다른 채소나 고명도 없이 바지락 하나로 국물 맛을 낸 칼국수는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바지락은 해감이 중요하다. 개흙이 국물에 들어가면 국물 맛을 망친다. 또 바지락은 오래 끓이면 조갯살이 질겨진다. 따라서 육수를 낸 바지락은 걸러내 해물파전에 사용한다. 다 끓여 나온 칼국수 그릇에 담긴 바지락은 면을 삶을 때 다시 넣은 새 바지락이다. 천일염으로 간을 하면 국물은 더욱 깔끔해진다. 미끄덩한 하얀 밀가루 면발은 국물 따라 후루룩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26호 까치할머니네 칼국수가 특히 유명하다.

“북한산 바지락도 끊겨서 어려워”

하지만 ‘장사꾼’ 아닌 ‘장사치’도 섞여, 거리를 이룬 식당 중엔 지역 특산물인 국산 바지락 대신 수입 바지락을 쓰는 곳도 있다. 바지락 수확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외국산 저가 바지락과의 단가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인천 옹진군 선재 어촌계의 한 간사는 “하루 바지락 수확량을 5천t으로 조절해 채취하는 만큼 연간 바지락 생산량이 크게 줄거나 늘진 않는다”면서 “단가 경쟁 때문에 서해 바지락은 내수보다 수출용으로 일본으로 많이 나가고, 저가의 북한산과 중국산 바지락이 내수용으로 쓰이고 있다”고 했다. 대부도의 한 식당 종업원도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북한산 바지락을 수입하는 업체에서 해감까지 시킨 상태로 받는데 이제 교역이 끊겨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재료에 들이는 정성이 없으면 맛이 좋을 리 없다. 바지락 육수의 시원한 맛은 온데간데없이 텁텁한 조미료 맛으로 육수를 낸 칼국수라면 푸짐한 양이 무슨 소용일까. 윤정진 한식요리사는 “바지락칼국수가 의외로 재료 맛 살리기가 어려운 음식이어서 원재료 선택부터 양심껏 하지 않으면 제맛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맛이 변하면 풍경도 변하게 마련이다.



경기도 국수와 함께 먹는 요리
편육·고기완자·해물파전으로 든든하게
옥천냉면집 고기완자

옥천냉면집 고기완자


먹고 돌아서면 꺼지는 게 국수라고 했던가. 국숫집에선 국수 외에도 함께 먹을 다양한 요리가 있다. 편육, 만두, 부침개, 도토리묵 따위다.
천서리막국수를 만드는 경기 여주 강계봉진막국수에서는 돼지고기 편육이 나온다. 한약재를 넣어 담백하게 삶아낸 편육은 잡냄새가 없고 쫄깃하다. 새우젓과 다진 양념, 겨자를 3 대 2 대 2로 섞은 장에 찍어 먹으면 술 한 잔과 어울리는 훌륭한 안주가 된다. 제주산 고랭지 무로 담근 새콤달콤한 무김치도 잘 어울린다. 비빔막국수와 먹어도 맛있다. 고기 한 점을 올려 메밀면으로 싸서 먹으면 씹을 것도 없이 목구멍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청양고추가 들어간 다진 양념으로 비빈 매콤한 국수와 고기가 어울려 맛이 달금하다.
경기 양평 옥천냉면집에선 편육과 고기완자를 함께 판다. 특히 고기완자는 주변 스키장을 찾는 이들이 들러 포장해갈 정도로 인기다. 크기는 주먹만한데, 동그랑땡은 여기에 견주면 우습다. 이북식은 만두도, 고기완자도 크게 만들어 하나를 먹어도 든든하게 대접한다. 고기완자를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돼지고기를 양파와 함께 곱게 다져 뭉친다. 밀가루를 살짝 묻히고 달걀물을 묻혀 프라이팬에 부쳐내면 끝. 적당한 기름기가 돌아 부드럽고 촉촉하다.
경기 안성의 대부도, 화성의 제부도에선 바지락칼국수에 해물파전을 곁들이면 든든한 식사가 된다. 해물파전은 밀가루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징어와 각종 조갯살이 듬뿍 들어간다. 뚝뚝 손으로 끊어 넣은 듯한 쪽파가 어울려 제법 먹음직스럽다. 그런데 식감이 좋지 않다. 이유는 바지락칼국수용 육수를 내고 버리는 바지락 조갯살을 파전에 쓰기 때문. 조갯살은 오래 끓이면 질겨져서 육수를 끓인 뒤엔 버리는데, 이곳 식당가에서는 파전에 넣어 재활용한다. 먹어도 되는 조갯살이지만 조금 질기다. 파전을 먹을 때 고개를 갸웃거리지 마시길.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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