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중요한 목적이 배움이라면, (갈무리 펴냄)는 제목부터 그러한 목적에 충실하다. 조합은 새롭다. 윤리적 노하우? 노하우가 ‘기술’이나 ‘비법’을 뜻하는 말이니 윤리적 행위의 기술이나 비법을 전수해준다는 말일까? 힌트가 되는 건 ‘윤리의 본질에 관한 인지과학적 성찰’이란 부제다. 윤리의 본질을 다룬 책은 많으므로 이 책의 방점은 ‘인지과학적 성찰’에 두어진다. 그것이 ‘노하우’와 연결되는 것이겠다.
윤리는 ‘노홧’이 아닌 ‘노하우’의 문제
저자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칠레 출신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인지과학자다. 과학자로서 생각하는 윤리 사상을 세 차례 강의를 통해 풀어나가고 있는데, 일단 그가 보기에 윤리는 ‘노홧’(know-what)의 문제가 아니라 ‘노하우’(know-how)의 문제다. 즉 이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발적 대처의 문제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일상적인 윤리적 행위는 반사적이면서 즉각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는 규칙보다는 습관을 따른다. 이것은 흔히 윤리적 행위를 윤리적 판단과 결부시켜서 이해하려는 서구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함축한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구성적 인지주의’ 혹은 ‘구성주의’에 토대한다. 그것은 같은 인지과학 내에서도 ‘계산주의’와는 대조되는 입장이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를 주도했던 계산주의는 지식을 추상적 논리의 대응물로 간주한 반면 구성주의는 구체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움직이고 만지고 숨쉬고 먹으면서 만들어가고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당신이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두판매대에서 담배 한 갑을 사고 느긋하게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불현듯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안다. 당연한 일이지만, 느긋했던 상태는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고 생각은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곧 바쁘게 가두판매대로 되돌아가 보는 당신에게 주변의 가로수와 행인들은 더 이상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새로운 상황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이니까. 이렇듯 우리는 ‘항상’ 주어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살아간다. 이때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반복적인 행동이 체화된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윤리적 행위 또한 그런 노하우의 산물이다.
윤리적 노하우의 관점에 서면, 중요한 것은 윤리적 인식이 아니라 윤리적 숙련 혹은 훈련이다. 앎이 아니라 습관, 더 나아가 성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구성적 인지주의는 그런 맥락에서 윤리에 대한 동양의 전통적 관점과 만난다. 바렐라는 특히 맹자의 인간 본성론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맹자는 인간에게 선한 본성이 내재돼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계발하고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오랜 수신(修身)을 통해서 형성된 품성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행동이 이루어지는 사람이다”.
자아란 ‘가상적 인격’에 불과하다이 정도의 ‘윤리적 노하우’라면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적’ 행위자의 행동이 중앙 통제적인 자아가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면 어떨까? 즉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실체성을 갖지 않는 ‘가상적 인격’에 불과하다면 조금 놀랄 만하지 않을까? 바렐라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자아가 가상적이고 비어 있다는 것이 현대 서구과학의 발견이다. 이것은 통일된 중심 자아를 부정하는 정신분석의 윤리와 만나면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경계해온 불교적 관점과도 조우한다. 사실 무아(無我)에 대한 불교의 오랜 가르침을 고려하면 그것은 ‘오래된 발견’이다. 대승불교의 핵심적 교리가 ‘비어 있음’(공성)과 ‘자비’라고 하면, 인지과학은 긴 우회를 거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이쯤되면 저자가 티베트 불교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다). ‘윤리적 노하우’가 열어줄 새로운 실천에 대한 명상으로 한 해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로쟈 인터넷 서평꾼·http://blog.aladdin.co.kr/mr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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