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연기가 무럭무럭 난다. 누가 불을 지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지난 6월,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는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을 함께 벌이기로 했던 하나은행이 국정원의 압력을 받아 후원 계약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논란의 와중에 세간의 관심에서 비켜난 질문이 있다.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이 좌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사건의 파문은 그저 시민단체 하나를 공연히 시비 거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서민과 소외계층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지원 프로젝트를 망치는 일이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지역 빈민에게 다시 빌려주다
(갈라파고스 펴냄)는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진앙지에 대한 책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불가능해 보였던 어떤 꿈에 대한 이야기다. 그 꿈에 재를 뿌린 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이 책부터 읽어야 한다.
마이크로크레디트는 방글라데시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무하마드 유누스가 창시자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갓 독립한 조국에 돌아와 치타공대학의 경제학과장으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처참한 빈농의 삶을 목도한 그는 “강의실에서 엉뚱한 개발 이론이나 가르치는 일에 혐오감을 느끼고” ‘지금 당장, 바로 여기에서’ 빈민의 삶을 개선할 방도를 궁리했다.
“전국 차원의 대규모 개발계획을 추진하는 시혜적 방식에 반대”한 유누스가 작은 실천에 나선 것은 1977년이었다. 은행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돈을 빌렸다. 그리고 지역 빈민 7명에게 다시 빌려줬다. 그해에 모두 58명의 빈민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돈을 빌려줬다.
이때부터 그라민은행의 독특한 모델이 만들어졌다.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빌려준다. 담보, 신용 조회, 보증인은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5명의 채무자로 구성된 모임과 이런 모임 8개가 모이는 지역 센터에 무조건 가입해서 회의에 꼭 참석하게 한다. 추가 대출 여부는 5명의 모임에서 결정한다. 한 사람이라도 제때 빚을 갚지 못하면 모임의 다른 사람들이 연대 책임을 진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빌린 돈으로 옷감을 만들어 팔았다.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 보따리 장사에 나섰다. 하루 두 끼를 먹다가 세 끼를 먹게 됐고,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고, 생존이 아니라 생활의 전망을 갖게 됐다.
유누스는 성장의 신화처럼 떠받들어진 ‘트리클다운’ 방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부자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면, 그 효과를 가난한 사람들도 받게 된다는 게 트리클다운의 논리다. 유누스는 반대편을 봤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빌려줘, 스스로 일하고 생산하게 했다.
1983년에는 그라민은행이 정식으로 설립됐다. 2009년 현재, 그라민은행은 방글라데시의 8만4237개 농촌 마을에서 2544개 지점을 열었다. 지금까지 780만 명의 사람들이 79억달러 이상의 돈을 빌렸다. 이자율이 시중 금리보다 비싼데도 상환율은 98%에 이른다.
2006년, 유누스와 그라민은행이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그 명성은 더욱 널리 퍼졌다. 관련 내용을 전하는 단행본 몇 권이 이미 국내에 번역돼 있다. 는 그 종합판이자 결정판이다. 캐나다 출신 언론인 데이비드 본스타인은 두 차례에 걸쳐 11개월 동안 현지 취재를 벌이며 책을 썼다. 책 전체가 한 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국가 개입보다 시장 논리를 신뢰하는 유누스는 시장주의에 가깝다. 개발·성장보다 분배와 빈곤 퇴치에 집중하는 유누스는 사민주의에 가깝다. 노조 설립을 마뜩잖게 여기는 감성은 우파와 닮았다. 대화와 설득의 힘을 믿는 작풍은 좌파와 비슷하다.
누가 한국에서 유누스의 꿈을 막나좌우의 구분을 넘어서는 그의 꿈은 한국에서도 이미 자라고 있다. 2000년 이후 속속 출범한 한국마이크로크레디트 신나는조합, 아름다운재단의 ‘아름다운세상기금’, 사회연대은행, 열매나눔재단 등이 모두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트리클다운의 신화 아래에서 신음하는 소외계층이 한국에도 있다. 유누스의 꿈은 한국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할 수 있다. 그 진화의 길목에 누군가 재를 뿌렸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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