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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업자의 자선

가난한 나라에 돈 꿔주고 원리금 수천억달러 챙기는 부자 나라의 ‘착취 구조’에 대한 고발장
등록 2009-06-18 13:57 수정 2020-05-03 04:25
〈탐욕의 시대〉

〈탐욕의 시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1만5천원

투자의 귀재라는 워런 버핏이 최근 5년간 자선기금으로 사회에 기부한 돈이 406억 달러를 넘고, 세계 최고 갑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 최고경영자 부부가 기부한 돈은 36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는 “당신들은 구호를 받는 가난한 자들을 원하지만, 나는 가난이 없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타인의 가난과 고통을 자신의 행복감을 배가하는 재료로나 여기는 무정하고 인색한 부자들이 즐비한 현실에서 버핏과 게이츠의 선행은 분명 돋보인다. 하지만 갑부들의 거액 기부를 마냥 찬양해도 될 만큼 세상사는 단순 명쾌하지 않다. 위고라면 당연히, 그런 거액의 희사를 예찬하기 전에 특정 개인들이 웬만한 국가들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능가하는 돈을 기부할 만큼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을 수 있고 또 그런 거액을 뿌려야 할 정도의 빈부격차가 존재하는 사회체제 자체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2000년부터 지난 4월까지 8년간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었고 5월부터는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일하는 전 제네바·소르본대학 사회학 교수 장 지글러에 따르면 버핏과 게이츠야말로 전 지구적 빈곤의 원인 제공자일 수 있다. 라는 책에서 이미 그런 모순구조를 고발한 지글러는 (원제: 수치의 제국)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부자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비용을 대기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 … 가난한 나라들은 해마다 부자 나라의 지배계층에게 자신들이 투자나 협력차관, 인도주의적 지원 또는 개발 지원 등의 형태로 받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한다.”

2006년 북반구 선진산업국들이 제3세계 122개국에 제공한 개발 지원금은 580억 달러였다. 같은 해 그 122개국이 그렇게 해서 받은 부채의 이자와 원금 상환으로 부자 나라에 갖다 바친 돈은 5010억달러였다. 이렇게 갚아나가는데도 부채와 상환액 규모는 증가일변도다.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외채 총액은 600억 달러 정도였으나 2001년엔 7500억 달러로 늘었다. 지구 인구의 80%가 사는 남반구 122개국 외채총액은 2조1천억달러나 된다.

버핏이나 게이츠가 고리대업자가 아닌 이상 그들이 그런 문제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가 문제 삼고 있는 것도 그들이 아니다. 지글러가 겨냥하는 것은 “인류가 이제까지 만들어낸 것들 중에서 가장 앞서 가는 첨단기술과 막대한 자본, 강력한 연구소들로 무장한 민간 다국적기업들”이다. 세계 500대 다국적기업들(이들의 58%가 미국적)이 지구 전체 생산의 52%를 차지하며 이는 중·하위 133개국의 생산액보다 많다. 에티오피아를 인구 720만 명이 빈사상태에 처한 ‘기아 천국’으로 전락시킨 커피값 폭락, 중요한 농산물 수출국이면서도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인구가 5300만 명을 헤아리는 브라질의 아마존 밀림이 목축과 바이오연료 채취를 위해 난도질당하는 비극도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다국적기업들, 그리고 거기에 아부하며 기생하는 현지 관리들과 법률전문가와 지식인, 장사치 등 소수 매판세력 때문이다.

지글러는 지금 세상을 봉건적 모순이 극에 달했던 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절에 빗댄다. 1791년 군대가 민중에게 발포한 샹드마르스의 학살 뒤 혁명가 그라쿠스 바뵈프는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희생자들이 늘어가는 이 같은 현실보다 더 구역질나는 전쟁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며 “민중들이여, 야만적인 구시대적 제도들을 모두 전복하라!”고 외쳤다. 지글러 역시 희망은 그런 세상을 거부하는 인간의 이성 속에 깃들어 있다고 본다. 지글러는 그 이성의 발현을 위해 자신이 전세계를 뛰어다니며 확인한 다양한 진실들을 책에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책이 새로운 봉건체제를 무너뜨리는 21세기 대혁명의 봉홧불이 되기를 소망했다.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 2008년 12월13일치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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