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게 생각한 책들을 놓으려고 책장의 가족앨범도 모두 버렸다. 그에게 옛날 일은 희미하고 단편적인 삽화로 떠오른다. 버린 앨범처럼 그의 기억 속에서 가족이라고 특별할 게 없다. “부인들은 집안에서 남편을 때리거나 맞았고, 부모들은 자식을 때리거나 맞았으며, 이웃끼리도 서로 때”린 집들 중 하나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자살에 성공한다. 어머니가 자살한 뒤 침대용 거울과 옷장 뒤편에서 어머니가 쓴 글이 발견됐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나이다.” 학교는 그에게 낯설었다. 그는 교실을 돌아다니는 선생님을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중히 경고받은 뒤에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지만, 선생님이 칠판에 글자를 쓰기 시작하자마자 토하고 만다.
자서전 (한겨레출판 펴냄)은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튀는 ‘문제적 생애’를 소설처럼 전한다. 파이어아벤트는 우리나라에 (1987)으로 소개된 과학철학자다. 1960~80년대 토마스 쿤()과 임레 라카토슈와 같이 활동했는데 그중 가장 과격했다. 그는 과학을 가능케 하는 원리는 ‘무엇이라도 좋다’가 다라고 말했고, 과학방법론에 만장일치란 일어날 수 없으며, 과학도 비이성적이라고 말했다.
소설처럼 펼쳐지는 자서전에서 어지럽게 그가 세운 이론의 흔적이 솟아오른다. 가령 전쟁 중의 일화로부터 ‘통약불가성’이 연결될 수 있겠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자란 파이어아벤트는 2차 대전에서 독일군에 참전한다. “내게 독일군의 점령과 그것에 뒤따르는 전쟁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지 불편함을 의미했다.” 이동 중 농가에 가서 배가 고프다고 우유와 옥수수빵을 달라고 했다. 주인은 친절하고 공손했지만 음식은 주지 않았다. “우리가 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몹시 놀랐다.” 그는 이때 ‘불가침투성’을 고통스럽게 경험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떤 말을 해도 그들을 각각 서로 분리시키는 부드러운 표면으로부터 되돌아오게 된다.” 이런 독특한 생애 인식 방식은 ‘통약불가성’의 토대를 이룬다. ‘통약불가성’은 이론을 선택하기 위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말이다. 대신 과학이론의 선택에는 심미적 기호, 형이상학, 종교적 소망 등 주관이 작용한다. 이 독특한 방식으로 참여한 전쟁에서 그는 총상을 입는다. 그 결과 다리를 절게 되고 성불구가 된다.
그는 포퍼를 사사받고 포퍼는 그를 인정하지만 그는 포퍼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포퍼주의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포퍼의 친위대’는 왜 논문에 포퍼 인용이 그렇게 적은가, 왜 포퍼와 다른 말을 하는가라는 말로 그를 공격했다. 그의 역작 이 나온 뒤 과학계는 예산 투자가 줄어든다며 그를 ‘과학계의 적’이라고 칭했다. 열정적이었으나 우울증이 그의 속에 똬리를 틀었다. “나는 거의 1년 동안 강의와 성악 레슨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세코날을 복용하고 밤낮없이 잤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시간 죽이기’였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자신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애 주기로 나눠져 숨가쁘게 이어지는 글에는 꼭 그가 그때 본 연극과 오페라 이야기가 들어간다. 그의 철학 역시 연극과 오페라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그는 과학이 철두철미 객관적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현학적인 언어에 싸여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그가 참조한 것은 그가 사랑하는 연극과 예술사였다. “네스트로이와 다다이스트를 좇아서 나는 어떤 견해를 표현할 때 학술적인 방식을 피하고, 그 대신 일상적인 언사와 쇼비즈니스와 육질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본 것이 ‘소설’처럼 느껴진 것은 그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은 시스템이 아니라 콜라주연극이 상연되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고 이해되고 감동을 이끌어내듯이 그의 과학철학도 무대에서 낭독되기를 원했다고 짐작된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관객에게서 새로운 이론들이 다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이 하나의 시스템이 아니라 콜라주라고 말한다. 이 자서전은 1994년 죽기 몇 주 전에 완성되어 사후에 발간됐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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