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춥고 TV는 지난해 4/4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고 보도하고 올해 월급은 현상 유지면 다행이다. 스산한 마음을 잊게 해주는 묘약들이 등장할 법하다. 고래부터 출판계에서 내려오는 묘약이 있었으니, 약의 처방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곤 했다. ‘가족’.
출판에는 어쩌지 못하는 ‘시간차’가 있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그에 맞춤한 듯한 책이 뜬다고 할 때, 출판한 회사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경제위기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책은 적어도 6개월은 공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연으로 모인 ‘가족’들인 셈이다.
퇴행적인 무조건적 희생어쨌든 김정현이 돌아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연간 베스트셀러’ 2위를 차지한 소설 의 저자다. 가 가정을 책임지고 끌고 가는 아버지의 고달픔을 그렸다면, 새로 나온 책 (은행나무 펴냄)에서는 그 아버지가 몸져누웠다. 이번에 ‘희생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그 아들이다. 경북 영주 시내에서 사진관과 결혼식장을 하며 일가를 이룬 아버지는 갑자기 뇌사 상태에 빠진다. 당시에 군대를 마치고 막 제대한 용준은 고향으로 내려온다. 대학은 작파하고 옆에서 아버지를 돌본다. 고향사진관을 그대로 건사하며 아버지 곁을 지킨다. 소설가가 용준의 친구인 ‘나’로 등장하는 실화소설이다. 용준은 신혼여행에서도 중간에 돌아오고 다른 도시로의 출타를 삼간다. 혹시나 임종을 지킬 수 없을까봐서다. 그러나 ‘효심’ 일념정진은 폭력적이기도 하다. 40도까지 열이 올랐던 아버지가 열이 내린 이후 용준과 어머니의 대화. “죽을 좀 끓여요.” “그래, 잣죽을 끓여야겠다.” “전복 없어요?” “전복? 아이고, 며칠 정신이 없어 그건 사다둔 게 없는데….” “참, 뭐든 죽으로만 드시는데 그런 걸 떨어트리면 어떡해요!” “그러게 말이다, 이놈의 정신.” 책의 3분의 2 지점에서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신다. 아버지의 죽음이 3분의 2 지점에 나오는 이유는 이후에 더 비극적인 사건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은 아버지에 대한 일화나 추억을 되새기는 일은 거의 없이 무조건적인 희생을 그린다. 그에 비해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집 (강 펴냄)는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꺼낸다. 무코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드라마 작가다. 대화나 설정만으로 상황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구체성’의 표본이 드라마의 작가라면 ‘시시콜콜’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표제작인 ‘아버지의 사과편지’는 이렇다. 보험회사 지점장인 아버지는 자주 손님을 불러 술잔치를 벌이고 그 뒤처리는 어머니의 몫이다. 추운 날 아침 현관문에 누가 토하고 간 것이 꽁꽁 얼어붙었다. 엄마는 벌겋게 부어오른 손으로 그걸 닦고 있었다. 무코다는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안하다는 소리 한마디 없다. 도쿄로 돌아오니 할머니가 편지를 전해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지난번엔 각별히 수고’라고 적고는 빨간 밑줄을 그어놓았다. 김밥 끄트머리나 소풍, 기념사진, 아이스크림, 크리스마스 케이크 등 한국인들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추억들이 짠하게 열거된다. 작가는 1981년 대만 여행 중 비행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에세이집은 1978년작이다. 이렇게 ‘몰입’이 잘 되는데, 30년 전 일본에서 통하던 이야기란 말이다.
베스트셀러 신경숙의 (창비 펴냄)는 이번 경제위기가 남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주자다. 어머니가 서울역에서 사라진 뒤 딸과 아들, 남편 그리고 친구 여인은 어머니를 추억한다. 에필로그에서 보듯 어머니는 여전히 행방불명이다. ‘너’로 등장하는 소설가 화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엄마와 부엌을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부엌이었고 부엌은 엄마였다.” 그런 ‘너’에게 언니는 엄마가 부엌을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엄마에게 직접 물은 ‘너’는 이런 말을 듣는다. “부엌을 좋아하고 말고가 어딨냐? 해야 하는 일이니까 했던 거지. 부엌이 감옥 같을 때는 장독대에 나가 못생긴 독 뚜껑을 하나 골라서 담벼락을 향해 힘껏 내던졌단다.”
2008년 경제위기의 화두는 ‘가족’이지만 그 가족은 이미 물음표들로 둘러싸인 정체불명의 것이다. 에세이집 (북스캔 펴냄)에서 김별아는 “가족은 언제고 완료형일 수 없다”고 말한다. 가족이라는 혼돈의 실체는 에서 유연한 형태로 나타난다. 페르세베라는 지중해의 보물을 따는 갈리시아 사람들은 끝까지 밧줄을 당겨 채취자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가족’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페르세베를 따는 법’).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가족이란 건 태어날 때 가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질 수도 있다. 유부남의 아이를 낳고 말기암 환자가 된 옛 스승과 아이를 기르겠다고 선언하는 소설가 유미리의 ‘가족창생’ 개념에 작가는 동감한다(‘가족창생’).
서하진의 (문학과지성사 펴냄)은 소설가가 쓰는 ‘착한’ 단어들의 반어법 그대로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소설집의 표제작에서 한 여인은 아들의 폭력사태에, 남편의 직장에서의 대우에, 불탄 남대문에 항의하는 딸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 변화무쌍하게 대응해나간다.
조영아의 (한겨레출판 펴냄)는 좀더 적극적으로 ‘가족 해체’를 발언한다. 기러기 아빠로 지내는 사내가 ‘아버지’를 파는 ‘사업’을 한다. 이 아버지는 사내의 아버지가 아니라 역할로서의 ‘아버지’다. 담임 선생님을 만나달라, 밥을 차려줄 테니 먹어달라, 아버지 같은 애인이 되어달라, 감금돼달라 등의 요구를 받아들여가면서, 가족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잃은 사내는 세상의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잃어버렸음을 알아간다.
노나미 아사의 (뮤진트리 펴냄)에 담긴 12개의 단편은 일본 각 지방의 풍경과 어우러져 펼쳐진다. 바람난 여자, 외도한 남편의 여자를 찾아온 여자, 가출한 아이를 찾아온 여자 등 여자들은 도시를 가지가지의 이유로 떠나왔다. 강요하지 않는 담담한 서술 속에서 가족은 한 개인의 무게보다 무겁지 않음을 보여준다.
눈에 밟히는 건 이 의문형의 가족이 ‘따뜻한 가족’으로 포장된다는 것이다. 는 (대교북스캔 펴냄)의 만 4년 만의 개정본이다. 당시 부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다. 작가의 의도는 4년 전과 변함이 없지만, 따뜻한 가족이 필요한 시대에 ‘이상한 사람’이란 적절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서하진의 소설집 은 신문광고에서 ‘우리 생에 전달하는 따뜻한 응원’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가족 해체를 겪은 뒤인데 아무리 춥더라도 ‘가족’은 이제 한 발자국 나가야 하지 않을까.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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