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라는 별명을 자랑스런 작위처럼 여기지만/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자들의 작위다/ 위험이 빤한 곳, 죽음이 빤한 곳에/ 비용 대신, 시간 대신 사람들을 밀어넣은 자에게 주는 작위였다.”(‘치욕’ 중에서)
시인이 ‘치욕’에 몸을 떤다. 푸르디푸르던 젊은 시절 몽땅 앗아간 “무쇠 철골 뒤덮인 그들의 공장”을 떠올린 게다. 그곳에선 “죽음과 피와 불구는 늘 곁에 있었다”고, “비용과 실적을 위해 사람목숨도 소모자재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고 몸서리친다. 그렇게 ‘노동하는 시인’ 백무산(53)은 신작 (창비 펴냄)에서 그리 오래전도 아닌 우리의 과거를 새삼 끄집어낸다.
“비용과 실적은 그들의 종교였다/ 죽어 개값도 못 받은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될지 그들만이 안다/ 그보다 몇십배는 될 불구된 사람들과/ 과부들과 아비 없는 자식들과/ 노부모의 한과 눈물이 있었다./ …그들의 성공은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치욕’ 중에서)
무크지 에 시를 처음 내놓은 게 1984년이다. 24년 세월이 흘렀다. (1988), (1990), (1996), (1999), (2003), (2004)까지. 그새 내놓은 시집만도 여섯 권이다. 4년여 만에 시편 62꼭지를 골라 일곱 번째 시선집으로 묶어내면서 백무산 시인은 이렇게 독백한다.
“부정의 언어를 버리겠다고 한다. 그 말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버리고 남는 것이 늙어가고 순응하고 안거를 즐기는 순명의 자연이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버리려던 것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이기도 하다. 운명적 자연은 억압권력의 토양을 형성해간다. …긍정은 부정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껴안고 넘어서는 데 있을 것이다. …다시 큰 시련의 시간이 밀려오고 있다!”(시인의 말에서)
시인의 ‘경고’가 아니어도, 도처에서 ‘반역’과 ‘퇴행’의 살풍경과 만나고 있다. 잃어버렸다던 10년 세월을 되돌리고도 부족한 겐가? 20년, 30년 전의 유행이 복고돼 거리를 떠돌고 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그들’의 허기가 채워질 줄 모른다는 점이다. 먹잇감을 노리는 ‘백수의 왕’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가죽만 백수의 왕이다/ 저 거들먹거리는 자태 용수철처럼 유연한 허리/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저 대담함/ …몸을 낮추고 시간을 정지시키는 저 집중력/ 웅크린 천개의 근육이 한꺼번에 탄성을 터뜨리며/ 바람을 가르는 쾌속의 질주/ 영양의 무리들 한가운데를 쫘악 찢으며/ 화살처럼 날아가 정확히 목표물을 물고 나온다/ 숨통을 단숨에 끊고 승자의 도도한 걸음으로/ 더러운 새끼들!”(‘백수의 왕’ 중에서)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겐가? 시인은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 우리 혹 스스로 꿈꾸기를 포기한 채 절망 아닌 절망을 했던 건 아닐까? 잘못된 꿈, 과열된 꿈에 이끌려 절망을 희망이라 우격다짐한 것은 아닐까? 불현듯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검은 얼굴의 두 사내가 쇼핑을 나왔다/ 할인매장 계산대에서/ 기름때가 다 가시지 않은 손으로/ 라면과 야채를 넣었다 뺐다 들었다 놓았다/ 돈을 맞추느라 줄였다 늘렸다 했다/ 계산서를 구기던 여직원이 무전기를 든 덩치를 불렀고/ 덩치는 주먹을 흔들고 욕을 퍼붓고 침 튀겼다/ 깜둥이 새끼들 돈 없으면 처먹지 말지/ 여기까지 와서 지랄은 지랄이야!/ …저 자리에서 절절매며 살던 덩치가/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던 때가 엊그제였다.”(‘기대와 기댈 곳’ 중에서)
“11월, 한무리의 학생들이/ 항의 데모하러 몰려간 곳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 겨울비 들이치는 비닐천막/ 나가라 학교에서 나가달라/ 학업에 방해되니 나가달라 핏대 올리며/ …좀 사는 집 아이들 한 달 용돈도 안될 돈 받자고/ 청소일 식당일 열 시간씩 하던 여자들/ 그 일도 더 할 수 없다 쫓겨난 여자들/ 그 등짝에 대고 물러가라 집에 가라 씨펄 아줌마 학교냐….”(‘저 높은 곳에’ 중에서)
허~, 이쯤 되면 해탈인가?시인의 ‘죽비’가 어깨를 친다.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 내리깔고 가던 길 갔을 뿐이다. 일상은 갈수록 거대해졌고, 삶은 나날이 복잡해졌다. 앞뒤 왼쪽 오른쪽 살필 겨를 없었다. 한동안 그리 살아왔다, 바쁜 걸음 옮기며. 그랬을 뿐인데…. 아뿔싸, 그것이 문제였던 게다.
“아,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들이다/ 더이상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노동이 자주 그렇게 만들었다/ 만들어가고 있다, 또다른 치욕도/ 저 치욕과의 대면이 이제 일상이 되리/ 그것이 우리의 즐거움도 되리/ 역사도 정치도 세계도 저항도 허공도 그 무엇도/ 일상 아닌 것 없는, 거대한 일상이.”(‘치욕’ 중에서)
깨달음은 때로 아픔을 동반한다. ‘치욕’도 깨달음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송곳 꽂을 땅 한 뙈기 없으면서도 그 땅에 꽂을 송곳은 내내 들고 살아왔다. “오직 사리사욕을 위해 전력을 다해 살고/ 사리사욕을 위해 싸우다 죽어라!” 어려서 읽은 ‘위인전’을 고스란히 쫓아왔다. 시인은 말한다. “순결한 분노는 사회적 명상이다.” 그러니 잠시, 시인의 추천을 따라 ‘고요’에라도 들어볼 일이다. 허~, 이쯤 되면 해탈인가?
“햇살은 부처/ 길은 법당/ 바람은 경전/ …내 목소리 크니 너의 목소리 들리지 않고/ 우리 목소리 크니 저들 목소리 죽고/ …내 자리 비워 너를 앉히는 일, 평화는/ 내 목소리 비워 뭇 생명의 소리 담는 일/ 평화는 너와 나를 방생하는 일….”(‘돌아오지 않는 길’ 중에서)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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