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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인생의 시간사용법

나쁘게 읽은 첫 번째 책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
베스트셀러 기술자들이 단시간에 전략적으로 만들어내다
등록 2008-10-09 11:05 수정 2020-05-03 04:25
베스트셀러 워스트리더

베스트셀러 워스트리더

베스트셀러는 시대의 감성이다, 라고 했다. 하지만 이 시대 베스트셀러는 후기 자본주의의 외피를 두르지 않고는 오를 수 없는 고지가 되었다.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조직적으로 길러져야 하는 섭리는 이제 대한민국 교육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베스트셀러를 분석하는 것은 기업화돼가는 출판시장을 분석하는 것이다. 마케팅은 베스트셀러의 유통이 아니라 생성부터 관여한다. 이른바 ‘기획’이 베스트셀러 시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시장의 선택은 여전히 ‘선’(善)이지만, 이는 ‘좋은 책은 잘 팔린다’라거나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라는 말들을 모두 옛말로 만들고 나서나 긍정되는 명제다. 베스트셀러를 분석한다면 독자들이 왜 이것을 읽나가 아니라,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나를 분석해야 한다. 이 분석이 꼭 감정적일 필요는 없겠으나, 내용까지 분석할 참으로 덤빈다면 ‘가장 나쁜 독자’가 적임이리라. 첫 번째 가장 나쁜 독자가 되어 읽어본 책은 (살림출판사)다.

랜디 포시는 한국 출판시장에 등장하기 전 이미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통해서 화제가 되었다. ‘마지막 강의’를 준비 중에 그 강의가 진짜 마지막 강의가 돼버린 사람. 카네기멜론대학의 컴퓨터공학과 교수인 랜디 포시는 췌장암 치료를 받으며 ‘연례행사’로 기획되던 마지막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의 한 달 전에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한 달 혹은 6개월이 남았다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강의 준비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가족과 함께 기억에 남을 일을 하며 지낼 것인가. 그는 자신을 ‘병(bottle)에 실어보내기로’ 결정한다. 강의를 동영상으로 찍어 자식들에게 남기기를 바란 것이다. 동영상 강의는 그의 살아생전에 UCC로 올려졌고 많은 이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강의는 2007년 9월21일 이루어졌다. 책은 미국에선 2008년 4월8일 출간됐으며, 한국에선 6월16일 1쇄를 찍었다. 살림출판사의 강훈 주간은 올 1월 최종본을 받아서 번역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10월부터 1월까지, 길어봤자 4개월간 영어 원고 집필이 끝난 것이다. 강의도 할까 말까를 망설이던 랜디 포시가 직접 책을 쓰진 않았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고, 더 빨리 쓰고,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서 쓰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인 제프리 재슬로가 그를 대신해 책을 집필했다. 서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랜디 포시는 하루에 한 번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이때 휴대전화 헤드셋으로 제프리 재슬로와 통화를 했다. 전화 통화는 53번 이뤄졌다.

이런 정황은 책을 전략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 됐다. 가공을 위해 ‘다시 쓸 필요’도 없었다. 랜디 포시의 휴먼 스토리는 ‘시간사용법’이라는 자기계발서가 되었다. 이 세상에 그만큼 시간을 성실히 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책의 처음에 나오는 ‘당신의 어릴 적 꿈을 진짜로 이루기’는 그가 마지막 강의에서 말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가 들려주는 삽화 중간중간에 직접적인 메시지가 끼어든다. “그러면 커크 선장의 능력은 무엇이었나? 어떻게 해서 그가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장이 될 수 있었을까? 정답은 ‘리더십’이라 불리는 기술이다.” 바람둥이로 소문났던 그가 눈을 뗄 수 없었던 최초의 여자와 잘 안 됐을 때(결국 결혼한다)를 그린 장은 이렇게 끝난다. “장벽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장벽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20년 동안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훈장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된 장면은 이렇게 정리된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진정한 희생이란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었다. 더불어 겸손의 힘에 관하여도.”

이렇게 경험과 교훈을 연결하던 책은 중반부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자기계발서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5장은 아예 ‘당신의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명쾌하지만 그게 전부만은 아닌 진리들이 나열된다. “시간은 명쾌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마치 돈처럼.” 돈도 명확하지 못한데, 하물며. “만약 우리가 그 일을 명확하게 해낼 수 없다면, 우리가 나아지고 있는지 나빠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왜 우리가 나아지고 있는지 나빠지고 있는지를 일일이 알아야만 하는 걸까.

완벽한 베스트셀러 아이템은 ‘선도매 시장’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지난해 말 이뤄진 한국어판 계약에서 이 책은 한국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2007년에 나온 의 선인세는 20만달러인데, 는 64만달러(약 6억4천만원)였다. 여기에 오르기까지 경쟁도 치열했다. 계약 시점에는 책의 텍스트도 나오지 않았다. 출판계는 랜디 포시가 마지막으로 해주는 말이 무엇이든 독자가 감동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출판사에 따르면 30만 권 판매가 손익분기점이다. 6월18일 출간된 책은 이틀마다 1쇄씩을 찍으며 선전했고(몇 권씩 찍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현재 20만 권을 인쇄했다. 출판사에서는 올해 말이면 손익분기점을 넘으리라고 예상했다.

랜디 포시는 선고받은 것보다 더 오래 살아 7월25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그에게 보낸 응원 메시지가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면 정말 다행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베스트셀러 워스트리더’는 3주에 한 번씩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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