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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끌어올렸다


영화 개봉 기점으로 급격한 판매량 변화를 보인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등록 2008-12-11 16:55 수정 2020-05-03 04:25
<눈먼 자들의 도시>

<눈먼 자들의 도시>

(해냄 펴냄)는 1998년 조제 사라마구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나온 ‘노벨상 특수’ 도서의 하나였다. 2002년 양장본으로 갈아입은 개정판이 나오는 등 스테디셀러로서 꾸준한 인기를 이어갔다. 베스트셀러로의 등극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2008년 11월20일이 분기점이었다. 그날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다. 분기점인 11월20일까지 팔린 책은 10만 부가량, 11월20일 이후 판매된 부수는 5만 부다. 불과 보름 사이 판매된 부수가 조용히 5년간 판매된 부수에 맞먹는다. 온·오프라인을 망라하고 영화 개봉을 기점으로 판매 순위 1위에 올랐다.

‘노출’은 판매의 힘이다. 출판사는 영화 개봉을 계기로 하여 특별한 마케팅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넷 포털과 신문과 잡지에서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이름이 계속 노출됐다. 영화 의 마케팅 비용은 15억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겨울 비수기 할리우드 영화에 할당된 합리적 비용이다. 흥행에서 기대에 못 미친 영화는 현재 50만8933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12월4일 집계 기준)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기대에 못 미친’이라는 기준은 판을 달리하면 대박이 된다. 5만 부는 사상 유례 없는 순간 판매량이 될 것이다. 이것도 50만 명에는 한참이나 ‘못 미치는’ 수가 되겠지만.

부담 없는 가격도 한몫했다. 는 2002년 개정판이 나올 때 가격 그대로 9500원이다. 인터넷서점 등에서는 40% 할인 가격에 판매된다. 5700원이다. 한 푼이 아쉬운 시절에 470쪽이 넘는 소설에 붙은 가격으로는 포만감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화면에 옮긴 영화화가 베스트셀러 등극의 조건이었지만, 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아이로니컬하다. 한 남자가 차를 몰고 가다가 멈춰선다. 차도는 경적으로 가득 차고 운전을 하던 남자는 말한다. “눈이 안 보여.”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눈이 ‘하얀 빛’으로 가득 차는 이 병은 ‘백색 실명’이라고 불린다. 첫 번째로 안 보이게 된 사람이 안과를 다녀온 뒤 안과 의사와 안과를 방문한 모든 환자들이 1차 감염자가 된다. 정부당국은 이들을 ‘정신병동’에 격리 수용하고 이들과 접촉한 실명 가능성이 높은 보균자는 옆 동에 가둔다. 눈먼 자들의 병동에는 단 한 명의 눈 뜬 자가 있다. 의사를 따라 병동으로 들어온 의사의 아내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는 알레고리로 가득하다. 의사의 아내가 이야기하듯 “여기(병동)에 온 세상이 다 들어와 있”다. 격리된 이들이 조직을 꾸리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저항해나가는 과정은 사회체제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원시시대 부족 같은 조직에 폭력적인 ‘깡패’ 정치체제가 등장한다. 이 체제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결국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인 의사 아내의 혁명적 행위에 의해 전복된다. ‘눈’과 ‘본다’와 관련된 온갖 용어들이 소설에서는 자유자재로 변주된다. 이는 그대로 인생사에 대한 알레고리다. 사라마구는 왜 이 병이 생겨났고 어떻게 전염되는지 관심이 없다. 원인과 과정은 비유적이다. 유추하자면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마지막 남은 양심의 보루인데 그마저 멀어버린 시대가 원인이다. 결국 실명이라는, 눈과 눈 가진 자의 ‘사적인 문제’는 전 사회적인 것이 되었다. 당연히 왜 단 한 명이 눈을 뜨고 있는지도 의학적으로 설명 불가다. 실명 상태에 도달했으면 하는 뼈저린 집단 속 고독을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눈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은유를 소설은 더 선호한다. 다른 말로 는 우화집이다. 눈이 멀었다는 극단적 가정을 인간에게 몰입시킴으로써 인간의 선과 악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잠언집이다.

한국은 공상과학소설(SF)이 유독 안 팔리는 나라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극단적 상황 설정이 잠언을 품으면 한국인들에게 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아들과 아버지만 남게 된 극단적 상황에서 시작하는 코맥 매카시의 도 올 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연말 오랜만에 문학적 성가가 높은 소설이 베스트 상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자력갱생’, 출판계의 숙제는 여전하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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