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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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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떠나니 친구가 필요해

등록 2008-04-04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별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까운 친구와 나누는 속 깊은 수다’

▣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우리 헤어져. 앞으로 연락하지 마. 그동안 즐거웠어.

사랑이 식은 뒤 이별을 통보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한 인터넷 사이트의 설문조사를 보면, 20대 남녀 7명 중 1명은 이처럼 문자메시지로 이별을 통보한 적이 있다고 한다. 휴대전화가 곧 ‘나의 분신’인 시대이긴 하지만, 이별 통보라는 힘든 숙제를 한 통의 문자메시지로 대신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예의 없고 비정하며 무엇보다 무책임하다. 만나서 직접 말할 때의 난처함을 피하고 매달려 징징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니, 다시 볼 사이가 아니라면 깔끔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별 통보를 문자메시지로 받는 순간 우리는 짐작해야 한다. 이 사람이 나와의 사랑을 소중히 곱씹을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랑은 불청객, 초대 없이 오고 가고

문자메시지로 차인 가장 유명한 스타는 팝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전 남편 케빈 페더라인이다. 그는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아내 브리트니와의 변함없는 사랑을 과시한 직후 방송 뒤풀이에서 문자메시지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별 메시지를 확인할 당시 페더라인의 절망스러운 모습이 동영상으로 포착돼 한때 블로거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사랑은 초대받지 않아도 올 수 있는 불청객이듯, 떠날 때도 매몰차게 가버리는 매정한 방랑자다. 속수무책인 이별 앞에서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실연의 고통 앞에 놓인 사람들은 식욕을 잃고 잠을 이루지 못하며 모든 것에 낙담한다. 온통 자신을 거부한 애인에 대한 분노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으로 주체할 수 없는 상심과 우울 증세를 겪는다. 영화 에 등장한 실연남 짐 캐리나 실연녀 케이트 윈즐릿처럼, 실연의 아픔은 사랑의 기억을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대 제프리 로버바움 박사와 그 동료들은 미국정신의학저널에 실린 논문에서 애인과 이별한 뒤 비통한 감정에 빠진 여성들의 뇌를 촬영한 결과를 보고했다. 6개월 이상 낭만적인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진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여성 9명에게 헤어진 애인을 생각하게 한 뒤 뇌를 관찰한 것이다. 그 결과, 감정과 관심, 동기를 추구하도록 하는 도파민 영역의 활동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걸 알아냈다. 실연이 가져다주는 깊은 비탄에 빠질 때, 감정·관심·동기를 관장하는 뇌 영역의 활동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애인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으며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고 호소했다. 여성들은 모두 이별 직후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으나 대부분은 2주 뒤 이런 증세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로버바움 박사의 연구 결과는 왜 우리가 실연 뒤 식욕이 떨어지고 매사에 의기소침해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지난 번 칼럼에서 소개했듯, 이별 직후 뇌는 사랑에 처음 빠졌을 때처럼 도파민 영역이 마구 활동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다시 말해, 이별 직후에는 관심과 동기를 관장하는 쾌락의 중추가 마구 요동치면서 잃어버린 사랑을 갈망하지만, 이내 이 영역은 현저히 활동을 멈추고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깊은 비탄’에 빠지게 된다. 이별의 아픔은 우리를 강하게 반발하고 ‘항의’하게 만들지만, 더 이상 사랑의 기쁨이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면서 무기력과 의기소침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실연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미국 뉴저지 주립대학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 박사에 따르면, 이별의 아픔은 때론 실연 남녀에게 우울증 증세와 유사한 ‘낙담 반응’을 경험하게 한다. 심지어 40% 정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동안에도 ‘애인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혹은 ‘우리가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낙담을 경험한다고 알려져 있다.

‘의기소침’은 절망을 내보이는 신호

남자와 여자는 실연의 아픔을 다스리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조심스럽게 일반화를 해보자면, 남자들은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애인에게 더 많이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갑자기 사랑의 아픔이 찾아오면 친구나 가족의 도움으로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알코올이나 무모한 운전 등 엉뚱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한편, 여성들은 친구나 선후배, 가족 등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들에게 조언을 얻고 속풀이 대화를 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실연의 슬픔을 극복하려 한다.

우울증에 대한 통계를 보면,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2배 이상 높으며, 여성이 우울증에 걸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실연이다. 실연한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우울증 측정에서 수치가 낮게 나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실연의 고통에 덜 민감하다는 뜻은 아니다. 남자는 이별의 고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심지어 그 고통을 자신에게조차 효과적으로 감추고 있기 때문에 설문조사에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증거가 연애에 실패한 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70∼80%가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사는 것이 고통일 때는 죽는 것이 쾌락’이라는 시인 존 드라이든의 표현처럼, 남성에게도 실연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인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별 뒤에 다 같은 정도의 슬픔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이별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제각각인데, 그 원인 중에는 자라온 환경도 포함된다. 어린 시절 애정 속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사람들은 대체로 자존감이 강해 이별 뒤에도 비교적 쉽게 절망을 극복한다. 반면,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해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들은 실연당한 뒤 존재의 근거 자체가 흔들리며 이별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가사처럼, 실제로 사람들이 이별에 그토록 절망하고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사랑하겠다는 절규를 한다면 그것은 애정결핍이자 정신질환에 가깝다.

실연 뒤에 연인들은 왜 의기소침해지는 걸까? 과학자들은 그들의 의기소침에는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자 폴 왓슨과 그의 동료들은 의기소침한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신호’라고 해석한다. 절망적일 정도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내보내는 믿을 만한 신호라는 설명이다. 친구나 친척에게 자신을 지원해달라는 뜻을 언어적으로 설득할 수 없을 때 보이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로 가장 좋은 것은 ‘가까운 친구와 나누는 속 깊은 수다’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그러면서도 인내심 있고 입이 무거운 친구를 찾아가 실패한 사랑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감정의 앙금을 털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별 직후 나누는 대화일수록, 친구는 그저 들어주고 위로해주려고 노력해야지 실연당한 사람을 평가하고 질책해선 안 된다. 지나친 간섭과 질책은 오히려 역효과라는 연구 결과도 보고된 바 있다(특히 부모님들은 명심하실 것). 영화 에 나오는 명대사를 잊지 말자. “이별한 여자에게 필요한 건, 함께 울어줄 친구지 비평가가 아니다.”

사랑에도 ‘복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평정심을 되찾거든, 다시 그 친구에게 가서 자신의 ‘사랑의 기술’에 대해 냉정한 조언을 구하라. 당신이 찼든 혹은 차였든, 실패할 사랑을 고르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사랑에도 ‘복기’가 필요하다. 버림받은 남자와 여자가 견뎌내야 하는 고통은 아마도 그로 하여금 장래에는 그와 비슷한 잘못된 선택을 피해가도록 하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이때에도 여전히 좋은 말만 듣길 바란다면, 친구를 잃진 않겠지만 사랑을 다시 얻지 못할 수도 있다.

*698호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전화가 있었다면’은 에 연재되고 있는 ‘김찬호의 문화인류학’ 617호치 ‘무선 핫라인 타고 사랑이 흐른다’의 주요 인용문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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