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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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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등록 2008-06-13 00:00 수정 2020-05-03 04:25

현재는 감정 이해가‘바퀴벌레’ 수준이지만 기계적으로 알고리듬화할 수 있으면 가능해

▣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환경대재앙으로 인해 인간들이 지구를 떠나버린 뒤 지구에 홀로 남겨진 로봇 ‘월·E’. 그는 700년 동안 묵묵히 지구를 청소하며 지내다 문득 ‘인격’을 얻게 된다. 덕분에 호기심과 고독을 느낄 수 있게 된 월·E는 인간들이 탑승한 거대 우주선 엑시엄의 파견 탐사로봇 이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월·E의 감정표현을 이해 못하는 이브는 지구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열쇠가 월·E에게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우주선으로 급히 귀환하고, 그 뒤를 월·E가 쫓아 나서면서 은하계를 누비는 로봇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 윌·E(오른쪽)는 ‘700년 동안의 고독’ 끝에 감정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영화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서서히 ‘아니요’에서 ‘예’로 바뀌고 있다.(한국 소니픽쳐스 릴리징 브에나 비스타 영화(주)제공)

2008년 여름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윌·E〉는 로봇공학의 오랜 숙제인 “과연 로봇은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도전한다. 영화 이나 〈A.I.〉가 그렇듯, 이 영화도 언젠가 로봇은 의식이란 걸 가지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우리는 오직 ‘영화를 볼 때만’ 이 가정에 너그럽다.

누가 로봇과 사랑하고 싶겠냐고?

5년 전만 해도 “과연 로봇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절대다수는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최근 로봇공학자들이나 인지신경과학자들은 로봇의 사랑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가능할 수도 있다’고 예측한다. 카이스트에서 내 사랑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절대다수는 “로봇이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고 대답한다(물론 카이스트 학생들이라서 이런 유물론적인 대답을 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것은 최근 들어 급속히 진행되는 ‘감정을 가진 로봇 개발’의 진척과 ‘사랑에 대한 뇌과학’의 성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듯싶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놔두고 왜 로봇을 사랑하겠느냐고? 로봇과 사랑에 빠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천만의 말씀! 앞으로 로봇은 10년 내에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가정의 동반자나 학교와 병원의 도우미로 가까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로봇이 인간과 공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외형이나 목소리를 흉내내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감정을 읽고 감정을 나누는 능력이 필요하다. 로봇의 ‘공감 능력’은 어쩌면 학습이나 기억 능력보다 로봇에게 더 절실히 요구되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인간형 로봇 ‘아시모’나 ‘휴보’는 자연스레 걸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들의 뇌는 거의 비어 있다. 그들이 쥐 수준의 뇌만 가져도 사회적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로봇공학자들은 감정을 읽고 이해하고 표현하고 심지어 인간처럼 느끼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물론 로봇이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수준은 현재 딱 ‘바퀴벌레’다. 사람처럼 스스로 복잡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다양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만족할 만한 수준이란 얘기다. 얼마 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과 컴퓨터공학과 교수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넥시’를 선보인 바 있다. 넥시는 다양한 얼굴 표정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비록 상황에 맞춰 알고리듬적으로 정해진 대로 행동하는 것이지만) 능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인간과 대화를 하거나 명령을 따를 때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얼굴 표정을 지으며 공감을 표현하는 로봇들이 부쩍 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개발된 원격 진료 로봇 ‘RP-7’는 의사 얼굴이 담긴 모니터와 카메라가 탑재된 바퀴형 이동 로봇으로, 병원을 돌며 환자에게 다가가 진료를 하기도 하고 질병을 진단하기도 한다. 이 로봇은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듯 모니터가 끄덕이며 환자의 질문에 반응해, 환자는 의사에게 직접 진료를 받는 느낌을 얻게 된다. 이런 작은 표현이 로봇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로봇공학자들은 로봇에게 감정을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아직은 주어진 상황에 맞춰 알고리듬적으로 감정 표현을 할 뿐이지만 조만간 실제로 감정을 갖게 되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다. 영화 에 나오는 ‘의식 있는 로봇’처럼 말이다.

영혼이 없어도 감정은 있다

‘로봇도 의식을 갖게 될 것이며 인간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과학자로, 미래전문가이자 문명비평가인 한스 모라벡 박사가 있다. 그는 로봇의 기억과 학습 능력, 주의집중 능력은 인간을 능가한 지 오래며, 조만간 그들이 의식과 감정을 갖게 될 것이며, 2030년 이전에 인간은 그들에게 지배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단언한다. 그가 자신의 저서 (1988)에서 처음 이런 주장을 폈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의 주장이 ‘근거 없이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로봇의 머릿속에서 감정을 어떻게 생성해낼 수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며, 심지어 인간의 대뇌가 어떻게 감정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이센테니얼 맨’처럼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로봇을 기대하는 것은 오직 영화 속뿐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로봇공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 중에선 ‘감정도 기계적으로 알고리듬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인간의 감정이 대뇌에서 편도핵을 중심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됐는데(물론 아직도 멀었다!), 만약 언젠가 그 실체가 밝혀진다면 감정의 생물학적 토대를 그대로 컴퓨터 회로에 구현하는 일은 원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신경전달물질은 전기신호로, 시냅스와 세포체는 작은 집적회로(IC)로 구현하는 일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영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도 사랑을 포함한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믿게 된 것이다(지난 칼럼에서도 지적했듯이, 사랑은 오히려 ‘감정’이라기보다는 ‘욕구’에 가까워서 더 구현하기 쉽다). 물론 아직은 여전히 ‘믿음’ 수준이지만.

만약 내게 인간이 로봇과 사랑에 빠질 날을 점쳐보라면 ‘2030년 이전엔 어렵다’고 대답하고 싶다. 물론 이미 미국에선 ‘섹스 토이’가 판매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섬세한 것이어서 매우 정교한 행동과 감정 표현을 요구한다. 로봇의 감정 표현 능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떨어지면 보고 싶어 못 견딜 것 같으며 섹스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로봇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만큼 ‘엄청난 도전’이 될 것이다. 원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을 이뤄내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니, 언젠가는 로빈 윌리엄스만큼 매력적인 로봇이 탄생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의 사랑을 책임질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과연 인간은 로봇이 느낄 사랑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제목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지만 실제로는 ‘인공감정’(Artificial Emotion)을 주된 모티브로 다룬 영화 〈A.I.〉는 첫 장면에서 관객에게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외롭고 심심해서 자신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램된 로봇을 만들게 된다면(이 영화에선 ‘메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들의 사랑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더 이상 그들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면, 언제든지 숲에 버리거나 폐기처분해도 될까? 로봇에겐 사랑의 상처를 줘도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단언하건대, 우리는 2050년 어느 날 문화방송 에서 이 주제로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로봇과 인간의 공생은 오랫동안 우리의 화두가 될 것이다. 물론 그날의 사회자는 손석희 교수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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