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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어느 곳에나 있고 아무 곳에도 없는 것

등록 2008-01-04 00:00 수정 2020-05-03 04:25

팔레오→네오→포스트 텔레비전 시대의 성찰, 장루이 미시카의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지하철에서도 본다. 버스 안에서도, 시켜놓은 음식을 기다리는 식당 한쪽에서도, 문득 생각나면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안테나를 세우고 단추 몇 개 누르면, 금세 익숙한 얼굴이 작은 화면에 가득하다. 물이나 공기처럼, 실로 시공을 초월한다. 언제 어디서나 늘 함께 있다. 텔레비전, 진정한 유비쿼터스다. 그러니 이게 웬 말인가? (장루이 미시카 지음·최서연 옮김·베가북스 펴냄)이라니.

“텔레비전은 어느 곳에나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 곳에도 없다. 영상은 무소부재하지만 정작 미디어는 부재인 세계로 우리는 진입하고 있다. 갈수록 영상은 늘어나지만 텔레비전은 줄어드는 그런 세계 말이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텔레비전이 없는 사회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미디어 전문가이자 사회학자인 지은이는 텔레비전의 지난 역사를 크게 셋으로 구분하는 데서 ‘종말론’을 시작한다. 들이댄 프리즘은 텔레비전과 시청자 사이 힘의 역학관계다.

먼저 ‘팔레오 텔레비전’ 시대다. 사용 가능한 주파수 대역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공급이 수요를 지배했다. 자연히 시청자는 제공되는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면서 ‘열등한 위치’에 놓였다. 텔레비전에는 ‘지식을 보유한 자들’이 등장했고, 시청자는 그저 ‘지식을 전수받는 고귀한 기회를 누리는 자들’에 불과했다. 명확한 위계질서가 있던 시절이었고, 소통은 일방적이었다.

민영방송과 유료 채널의 등장으로 시청자의 선택폭이 넓어지면서 이런 구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네오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한 게다. 각 방송사들은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고, 시청률 조사에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마치 선거전에 돌입한 정치인들처럼” 텔레비전은 ‘즐거움을 주는 이’가 됐고, 시청자는 ‘즐거워하는 이’가 됐다. 여전히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는 벽이 존재했지만, “듣는 이가 언제든지 듣기를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이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게다.

이어 등장한 ‘포스트 텔레비전’ 시대, 이제 시청자는 텔레비전에게 ‘무제한적인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지은이는 “네오 텔레비전에서는 평범한 개인일지라도 특별한 무언가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다”며 “포스트 텔레비전은 이런 최후의 조건마저 철폐해버렸다”고 지적한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구별이 처음으로 사라진 게다. 그럼에도 ‘성역’은 완고했다. “그 어떤 특별한 경험도 하지 않은 평범한 시민에게조차 발언권이 주어졌다”지만, “이 발언권은 여전히 전문적인 편집 책임자가 부여하는 것이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종말’은 여기서 싹튼다. 방송 통로와 채널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시청자는 원하는 프로그램을 스스로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채널은 무의미해졌고, 프로그램의 시간적 순서는 파괴됐다. 다만 프로그램과 이를 선택하는 시청자만 있을 뿐이다.

대담해진 시청자는 한발 더 나아가, 이제 제작자의 지위까지 넘보고 있다. 지은이는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나누고, 직업과 취미를 구분하는 만리장성은 사실 제작이 아니라 유포에 있었다”며 “무엇보다 큰 변화는 자신이 제작한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해 유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누구나 미디어 제작자가 되지는 않을 테지만, 원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텔레비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기실 ‘종말’은 텔레비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문을 포함한 ‘전통 미디어’ 모두가 이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야흐로 무한 정보의 시대가 아닌가. 필요한 정보를 원하는 대로 취사선택하고, 또 스스로 정보를 만들어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미디어 전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공론장’ 구실을 해온 미디어가 무너진 자리는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지은이는 “시민들이 충분한 자원과 덕성을 바탕으로 스스로 필요한 공적 공간을 재건할 수 있기를 기원해야 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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