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클래식 마니아 기사와 함께 베토벤을 들으며 강변북로를 달리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택시를 탔다. 늦은 밤이었다. 보통의 택시 기사는 그 시간에 문화방송 라디오나 교통방송을 듣는다. 승객도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택시 안에서 안 좋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명하신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만 안 틀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설교 테이프를 트는 것으로 모자라 직접 전도 일선에 나선 기사가 있었다. 처음에는 “예, 예” 하면서 응대하다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안 했더니 “어른이 말하는데 들어야지!”라며 역정을 냈을 때는 당장 문을 열고 내리고 싶었다. 불행히도 택시는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었다. 예수쟁이에 꼰대이기까지! 그런 택시라면 다시는 타고 싶지 않을 수밖에 없다.
“바흐는 글렌 굴드로 들어야…”
그런데 “신촌 부탁드립니다”라고 말을 뗀 그날 밤은 뭔가 달랐다. 택시 안에 클래식이 흐르는 것이다. 그것도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이 말이다. 특이하게도 93.1을 틀어놓으시는 분이군, 하면서 기사님의 얼굴을 슬쩍 봤다. 아니나 다를까, 인자함과 격조가 풍기고 있었다. (나는 평생 들은 음악이 그 사람의 외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놀라운 선입견의 소유자다.) 우리는 별 대화 없이 기사와 승객이라는 각자의 직무에 충실하게 합정역쯤을 지났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카 오디오에는 ‘93.1’이라는 숫자 대신 ‘CD’라는 문자가 있었다. CD를 트는 택시 기사도 만나기 힘든데 게다가 클래식이라니. 물을 수밖에 없다. “기사님, CD를 트시네요. 클래식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나 다를까, 회심의 미소가 느껴진다. “네, 유일한 낙이죠.” “글렌 굴드 좋아하세요?” “바흐는 역시 글렌 굴드 연주로 들어야 진가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 아저씨, 뭔가 대화가 통할 것 같다. 비록 클래식에는 조예가 없지만, 아니 사실은 나의 오타쿠 인생 30년에 비춰볼 때 클래식에까지 손대면 패가망신하기 딱 좋으니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어쨌든 음악 이야기가 가능한 택시 기사라니. 그것도 남진과 나훈아의 비교분석이 아니라 바흐를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른 감상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러면 CD도 많이 가지고 계시겠어요.” “평생 모은 게 한 7천 장쯤 됩니다.” 택시는 합정을 지나 홍익대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우아, 이런 택시 처음 타봤어요. 저는 베토벤 좋아하거든요.” 아차 싶었다. 자칫 “베토벤은 말이죠. 바흐에 비하면 솔이 없어요. 이 사람 안 되겠구만. 음악을 몰라. 왜 바흐가 베토벤보다 위대하냐. 나아가 왜 우리는 바흐를 들어야 하냐에 대해 논할 것 같으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진다. 대화의 소재만 바뀔 뿐, 본질적으로는 주님의 성령과 은혜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예의 그 기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 기사님은 역시 달랐다. 괜히 인자하고 자애로우며 격조까지 갖춘 인상의 소유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세요? 그러면 베토벤을 들어볼까요? 어떤 작품 좋아하시는데요?” 그는 의자 밑에서 가방을 하나 꺼내들어 열었다. 세상에, CD로 가득 차 있는 가방이었다. “7번 교향곡 좋아합니다.” (순전히 때문이다.) “아, 그러시구나.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도 있긴 한데….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BBC 레코딩으로 들어볼까요?” 그는 같은 애호가만이 느낄 수 있는 숙달된 손놀림으로 탁탁탁탁, CD 가방을 넘기더니 한 장의 CD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플레이어에 걸었다. 그것 자체로 감동이었다. 클래식을 듣는 택시 기사라는 사실도 충분히 감동인데 리퀘스트 시스템까지 도입하고, 게다가 신청자의 ‘니즈’와 현실을 조화시킨 선곡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이런 기사가 300명만 됐으면
한국에 이런 택시 기사가 딱 300명만 돼도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우리 사회는 정말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쌀로 밥짓는 생각부터 과연 이 기사님의 전직은 무엇이었을까, 저 단정한 차림과 품위 있는 인상으로 보아 최소 30년 정도는 매일 아침 넥타이의 매무새를 만졌을 것 같은데, 하는 소년탐정 김전일의 추리까지 오만 가지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BBC 세션은 아나운서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연주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베토벤은 호쾌해요. 그게 매력이죠. 이 BBC 세션은 제가 보기엔 베를린 필하모닉보다 그런 면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수가, 친절한 곡 해설까지! 어쩌면 이 아저씨는 낮에는 클래식 평론가로, 밤에는 서울의 택시 운전사로 활동하는 투잡맨이 아닐까. 과연, 이런 말을 들으니 처음 들어보는 BBC 세션은 그 어떤 7번보다 호쾌하고 박력 있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감동에 젖어 몇 악절을 듣기도 전에 택시는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계산을 하려는 찰나, 그는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베토벤은 역시 강변북로를 달리며 들어야 맛인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소중한 기회를 하찮은 약속 때문에 놓쳐서야 어찌 호연지기를 가진 사나이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경험은 능히 칼럼으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은가. “달리시죠.” 우리는 그렇게 1악장과 2악장을 들으며 심야의 드라이브를 즐겼다. 다시 신촌으로 돌아왔을 때는 3악장이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3천원이면 갈 거리를 1만5천원이나 지불해야 했고, 약속 시간을 40분이나 어긴 까닭에 친구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은 뒤 술도 사야 했다. 술값은 3만원. 원래 얻어먹기로 한 자리였으니 손익을 따져보면 마이너스 4만2천원이었다. 칼럼 소재의 대가치고는 분명히 너무 비쌌구나, 라고 나는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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