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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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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에로틱한 마흔 살 남자

등록 2007-08-24 00:00 수정 2020-05-03 04:25

스웨이드의 보컬이었던 브렛 앤더슨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리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1993년 얘기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2집을 발표하고, 에밀 쿠스트리차의 이 한국에서 개봉했으며, 김영삼(YS) 집권과 함께 ‘오렌지족’과 ‘X세대’라는 말이 등장했던 때다. 요컨대 한국에 전대미문의 대중문화에 대한 열망이 밀려왔던 때다. 지금이야 음악이건 영화건 ‘자국산’만이 주로 이슈가 되고 있지만 그때는 ‘외제’도 만만치 않았다. 멋쟁이라면 한국 음악이나 영화보다는 외국의 그것을 즐겨야 했고, 그게 당연했다. 그해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화제가 됐던 영국 밴드가 있었다. 스웨이드다.

도발적 비음과 궁극의 허리놀림

동성애와 에이즈가 동급이었던 시절,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는 음반 표지는 충격이었다. 함께 모여 음반을 플레이했을 때 기타는 도발적인 배킹을 시작했고 보컬은 단도직입적으로 그전에 들어본 적 없던, 관능과 충격이 뒤범벅된 비음을 터뜨렸다. 초등학교 때 처음 포르노를 봤을 때, 처음 광주항쟁 사진집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섞이는 기분이었다. 섹스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도 없었고(사실, 있었다 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처참한 현실의 비극은 더더군다나 없었다(역시,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음악 잡지도 꽤나 잘 팔렸다. 성정체성과 마약에 대한 논란, 그리고 무엇보다 블러와 함께 브릿팝의 시대를 열어젖힌 도발적 음악으로 영국에서 화제를 불러모으던 이들은 국내 음악잡지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졌고 이에 따라 당연히 국내 팬들도 늘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997년, 이들의 최대 히트작인 3집 (Coming Up)에 담긴 (Beautiful Ones)와 (Trash)가우리 나라 라디오에서도 꽤나 자주 흘러나왔고 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밴드의 인기를 한 몸에 끌어안고 있던 이는 보컬인 브렛 앤더슨이었다.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예쁘고,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카리스마 넘쳤던 외모. 앞서 언급했던 그 도발적 비음과 모호한 성정체성, 관능적 춤사위와 궁극의 허리놀림, 필살의 마이크 돌리기 등으로 브렛은 당대의 섹시 아이콘, 아니 이를 넘어선 로망의 완성형처럼 보였다. 스웨이드의 전성기 때 브렛 앤더슨과 ‘매력’은 곧 동의어와 다름없었다. 그런 매력과 카리스마가 이후 그들의 인기와 영향력이 쇠퇴하고 2003년 결국 해체를 선언할 무렵에도 여전히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했던 힘이다.

뜬금없이 왕년(이라고 하기에는 비교적 가까운 세월)의 록스타 얘기를 꺼낸 건, 그가 한국 공연을 다녀갔기 때문이다. 지난 8월9일, 브렛 앤더슨이 무대에 섰다. 그의 나이는 이제 마흔이다. 검정색을 고수하던 머리는 이제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누가 봐도 미청년은 아니었지만 미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했다. 브렛 앤더슨이 한국에 다녀간 건 처음은 아니다. 2005년에도 스웨이드의 원년 기타리스트인 버나드 버틀러와 함께 티어스를 새롭게 결성, 성공리에 내한 공연을 마친 바 있다. 그럼에도 이번 공연이 티어스 공연보다 관심이 쏠렸던 이유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티어스는 스웨이드 시절과는 결별한 새로운 팀이었다. 공연 때 스웨이드 노래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기자회견에서도 그때와 관련된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첫 솔로 음반을 발매한 브렛 앤더슨은 다른 나라 공연에서 옛 히트곡들을 불렀다. 요컨대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됐던 그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공연이었던 것이다.

그 소년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무대에 선 브렛 앤더슨은 옛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매력과 카리스마로 넘쳤다. 여전히 관능적이고 섹시했다. 세상의 모든 마흔 살 남자 중 가장 에로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록스타라는 직업을 15년이나 지켜온 관록도 유감없이 빛났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한때 스웨이드의 열성팬이었으며, 언젠가부터 관심이 멀어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온갖 상념이 떠오르는 공연이기도 했다. 과거에 남녀를 막론하고 성호르몬을 쏟아내게 했던 그 마성의 비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심지어 홀로 어쿠스틱 기타를 튕기며 (Wild One)을 부를 때는 탁성마저 나왔다. 와 를 부를 때, 세상의 틈을 찢어버릴 듯하던 관능적 비음은 ‘생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공연 전 그를 만났을 때, 첫인상은 너무 말라 초췌해 보였다. 솔로 음반 수록곡을 부를 때의 차분함과 그 첫인상이 맞물려 사라져버린 세월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 먹은 브렛 앤더슨을 통해서, 비음의 부재를 통해서, 역으로 함께 나이를 먹어오며 나에게서 사라져간 뭔가를 떠올리며 홀로 씁쓸했던 것이다. 참으로 주책맞다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아마 7080콘서트에 찾아가는, 언젠가부터 음악에서 멀어져버린 중년들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었다. 김광석의 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조용필의 한 소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그러고 보니 왕년의 브렛 앤더슨은 세계에서 단발머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간이었지. 비록 그때도 소녀라기보다는 팜므파탈에 가까운 남자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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