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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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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이여, 성금만 내지 마라

등록 2008-02-22 00:00 수정 2020-05-03 04:25

9·11 이후 뉴욕의 뮤지션들이 그랬듯, 숭례문의 검은 잔해를 음악으로 남겨두는 일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연휴의 마지막 밤, 소스라치는 소식에 TV를 켰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붕괴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가본 적 없는 백화점이고 건넌 적 없는 다리였다. 그러나 숭례문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며 처음 겪는 기분이 들었다. 참담하고 어이없고 황당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숭례문이다. 유치원 들어가기 전부터 지난주까지, 얼마나 많이 숭례문을 지나다녔던가.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숭례문이 불타고 있었다. 60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임진왜란도 6·25도 피해갔던 숭례문이 네 시간 만에 폭삭 주저앉았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지붕이 내려앉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내려앉는다’라는 상투적 표현 말고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20년을 넘게 다니던 동네 시장 떡볶이집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9·11의 비탄감, 부시에 대한 분노

2001년 9월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WTC)에 비행기가 처박히는 모습을 본, 뉴욕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빌딩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수십 번 반복해서 지켜본 뉴욕 시민들의 마음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기나 수돗물 같은 일상의 한 요소가 급작스레 사라질 때의 상실감과,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 삶이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국보 1호의 전소라는 비싼 대가를 치른 뒤에야 얻었다. 별로 겪을 필요 없는, 전혀 지불하고 싶지 않은 대가다.

뉴욕 시민들은, 아니 뉴욕에 거주하는 뮤지션들은 그 경험을 음악으로 풀어냈다. 공식적으로는 제니퍼 로페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넬리, 엔싱크 등 정상급 팝가수들이 모여 마빈 게이의 명곡 〈What’s Going On〉을 리메이크했다. 1971년 발표된 이 노래는 마빈 게이가 어느 날 아침 조간신문을 보다가 만든 노래다. 신문에 온통 도배되다시피 박혀 있는 참혹한 뉴스들, 그러니까 베트남전쟁의 참상과 게토의 비참한 실태, 그리고 파괴돼가는 환경 등등. 아마 마빈 게이가 이 노래를 만들던 날의 그 기분은 9·11의 미국인들에게 똑같이 전이됐을 것이다. ‘어찌 돼가는 거야?’(what’s going on?)라는 망연자실한 질문 말이다. 공식 추모곡으로 발표된 이 노래 말고도, 많은 뮤지션들이 개인적으로 9·11의 소회를 노래했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록 뮤지션의 하나인 존 메이어는 라이브 음반 〈Any Given Thrursday〉에서 〈Covered In The Rain〉을 부른다. ‘세상이 점점 차가워지는 요즈음…’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존 메이어는 9·11 당시 느꼈던 감정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라져버린 표지판 아래 서서…’라는 가사가 그라운드제로를 연상케 하지만 무엇보다 막연한 상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은 5분여 동안 울어대는 그의 기타 연주다.

9·11의 비탄감을 음악에 담아낸 이들은 이외에도 많다. 소닉 유스는 2002년 음반 〈Murray Street〉를 통해, R.E.M.은 〈Around The Sun〉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당시의 소회를 잔잔하게 묘사한다. 분노보다는 애도요, 격정보다는 추모다. 그리고 2002년 즈음 뉴욕 인디 록 신에서는 전례없이 어두운 음악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인터폴, 워크멘 등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주목받은 밴드다. 공허하고 음산한 그들의 음악에는 그라운드제로를 맴돌고 있는 WTC의 먼지가 떠다니는 듯했다. 그런 음악은 말로 채 표현할 수 없는, 뉴욕 시민들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게 아니었을까. 부시는 9·11을 빌미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아프가니스탄을 쳤다. 연달아 이라크에도 포격을 가했다. 그런 부시 정권에 대한 분노도 미국의 뮤지션들은 그대로 표현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그린데이, 소닉 유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음악만으로도 한 사회의 흐름이 그대로 읽혀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음악인들이 외면할 수 있으랴

다시 숭례문으로 가자. 신속히 범인이 체포됐고 책임 공방이 뜨겁다. 3년 안에 원형 그대로 복원하겠다는 계획도 발표됐다. 전쟁도 소요 상태도 아닌 지극히 평온한 일상 속에서 국보 1호가 불에 타 없어졌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걸로 충분한가. 소실부터 복원까지 이어지는 감동의 드라마면 만족스러운가. 책임소재가 분명해지고 누군가 옷을 벗고 범인은 체포되고…. 이 과정이 폭삭 주저앉은 우리 마음을 다 메워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서울에 사는 뮤지션들도 다른 시민들과 같은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불타는 숭례문의 참상을 음악으로 표현했으면 좋겠다. 위협받은 우리의 일상을, 사라져버린 서울의 랜드마크를, 화마가 삼켜버린 600년의 시간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로 그들이 그려냈으면 좋겠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숭례문 복원을 국민성금으로 하자는 흰소리를 꺼냈다. 여론이 싸늘한 가운데, 정상의 연예인들이 거금을 쾌척했다. 비난받을 일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라면 기부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충분히 있을 것이다. 돈으로는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다. 복원과 함께 잊혀질, 저 검은 잔해를 음악이든 미술이든 서사든 그 무엇으로든 남겨두는 일 말이다. 범부들의 가슴에도 거대한 영감을 안겨준 그 순간과 공간을, 어찌 음악인들이 외면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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