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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헤드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등록 2007-10-12 00:00 수정 2020-05-03 04:25

새 음반 발매 전 음원을 전세계에 공개한 파격…공연문화가 빈곤한 한국으로선 그저 먼 나라 이야기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영국의 밴드 라디오헤드가 홈페이지를 통해 새 음반이 발매된다고 발표했다. 발매일은 10월10일. 라디오헤드 정도의 뮤지션이면 지금쯤 세계 어디에서나 예약 판매라든가 사전 프로모션이 벌어져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잠잠하다. 적어도 음반 산업에 연관된 매체나 사이트는 그렇다. 이들의 새 음반 발매가 기존 레코드 산업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10월10일 발매되는 이들의 새 음반 〈In Rainbows〉는 ‘음반’이 아니다. 디지털 음원이다. 음반 발매 전 음원을 먼저 공개하는 건 국내에서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라디오헤드는 이런 수준도 뛰어넘는다. 음원을 공개하되, 사이트(www.inrainbows.com)를 통해 사전 예약을 한 이들에게 10월10일 전세계 동시 다운로드를 실시한다. 가격은? 사용자 마음이다. 원하는 만큼 내고 새 음반의 음원을 받아가라는 것이다. 즉, 공짜로도 라디오헤드의 새 음반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밥벌이는 음반이 아니라 공연으로

이 사이트에서는 또 하나의 사전 예약을 할 수 있다. 새 음반의 수록곡과 정식 음반에 담기지 않는 미수록곡, 그리고 이 음반의 LP와 각종 아트워크가 담긴 〈In Rainbows〉의 박스세트다. 이 박스세트 역시 사전 예약을 받아, 딱 그 수량만큼 오는 12월10일 일괄 발송한다고 한다. 다운로드 음원과 박스세트에 대해서는 어떤 프로모션도 없으며 스트리밍도 실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밴드 쪽은 못박고 있다. 그리고 내년 초에나 일반적인 형태의 CD가 발매된다고 한다. 이는 MP3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음악산업의 고민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라디오헤드의 문제 제기다. 음반을 내고 음원이 돌고 훗날 박스세트를 내는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다. 아무리 음반을 사달라 외쳐도 MP3를 비롯한 디지털 음원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걸.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이후 음악 산업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악보 산업이 음반 산업에 밀려 쇠퇴했듯, 이제 음반 산업도 100년 전의 악보 산업과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리 유료 음원의 매출액이 높아진다 한들 불법 다운로드의 규모를 따라갈 수는 없다. 음반사에서 매체를 위해 찍는 홍보용 음반에서 추출된 MP3는 음반 발매 전 이미 인터넷을 타고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이런 상황에서 라디오헤드는 자신들이 먼저 음원을 공개해버리며 ‘시장’을 무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음악 수용 방식의 급격한 변화 앞에서 거북이 걸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대 음반사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라디오헤드는 음반사를 통하지 않고도 뮤지션과 팬이 직접 만날 수 있는 시대의 패러다임을 누구보다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천문학적 액수의 마케팅 비용을 들여도 만들어내기 힘든 이슈를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그들의 홈페이지는 이미 하루 종일 접속 폭주 상태를 보이고 있다.

라디오헤드의 파격이 가능했던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그들은 지난 음반 〈Hail To The Thief〉를 끝으로 오랜 소속사였던 EMI와 결별했다. 그 뒤 지금까지 어떤 음반사와도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다. 즉, 라디오헤드는 현재 기존의 ‘음반 산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몸인 것이다. 따라서 음반을 내기 전 음원을 공개한다 한들, 누구도 그들에게 태클을 걸 수 없다. 두 번째, 우선 프린스의 말을 인용해보자. “요즘은 음반 판매가 아닌 공연으로 돈을 버는 시대다. 그러니 음반은 공짜로 듣게 해도 된다. 대신 그들을 공연에 오게 하면 된다.” 영국 공연을 앞두고 한 일간지를 통해 새 음반 〈Planet Earth〉를 무료로 배포한 뒤 프린스가 했던 얘기다. 라디오헤드가 새 음원을 공짜로도 다운받을 수 있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에게는 음반 수익을 상회하는 공연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라디오헤드가 어떤 시도를 하건, 그들의 밥벌이에는 큰 타격을 주지 않는다. 음반이 있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공연 시장이 음반 산업의 사양길에도 불구하고 뮤지션들을 지켜주는 것이다.

무료 공연에 길들여진 한국 관객들

그래서 라디오헤드의 실험은 먼 나라 얘기다. 부재에 가까운 우리의 공연 시장 때문이다. 서울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된 콘서트홀 하나 없고, 체육관 등의 시설에서 공연을 하기에는 음향이나 관람 환경 모두 열악하다. 게다가 각종 지방자치단체와 대학가에서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는 무료 공연에 길들여진 관객은 유료 공연을 찾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러니 적든 많든 음반 수입에만 의존하고 CF와 행사 하나라도 따내려 온갖 쇼 프로에서 신변잡기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공연 인프라도, 시장도, 관람 문화도 갖지 못한 한국의 뮤지션들이 라디오헤드처럼 미래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는 건 그래서 기대하기 어렵다. 디지털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연은 아날로그다. 공연이 살아야 미래의 음악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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