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음반사·예술영화 전용관이 함께한 모범 마케팅 ‘그레이트 고딕 트라이앵글’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마케팅이 콘텐츠를 지배하는 세상이다. 콘텐츠 자체의 퀄리티를 떠나 ‘어떻게 파느냐’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각종 끼워팔기부터 시작해서 판매 순위 조작 등 편법과 변칙이 판친다. 출판계에서의 사재기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음반업계에서도 휴대전화 고리부터 화장품, 책까지 온갖 물품을 끼워주며 ‘정통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A에 B를 덧붙여 파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그저 뚜렷한 콘셉트 없이 마구잡이로 갖다붙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돼지를 접붙일 때도 품종과 혈통을 따져가며 교미를 시키기 마련인데 앞뒤 가리지 않고 끼워주니 콘텐츠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마케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개념 없는 마케팅이 문제다. 콘텐츠의 이해를 돕는 마케팅을 누가 뭐라고 하랴.
와 함께 등장한 고딕
여기, 마케팅의 모범 사례가 있다. 출판사 생각의나무와 음반사 파스텔뮤직, 그리고 예술영화 전용관 아트시네마가 뭉쳤다. 고딕을 주제로 ‘그레이트 고딕 트라이앵글’이라는 기획을 마련한 것이다. 시기는 달라도 고딕은 대중문화가 사랑한 양식이었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교회의 엄격한 교리가 세속을 지배한, 암울했던 중세시대를 모티브로 하여 발전해온 고딕은 죽음의 공포와 거스를 수 없는 어두운 운명에 대한 위압을 글과 그림, 음악으로 표현해왔다. 그로테스크, 신비, 고독이 주된 주제였으며 이 주제를 묘사하기 위한 독특한 표현 방법들은 자체적으로 발전하고 다른 장르와 만나 수많은 하위 스타일을 형성했다. 문학에서는 의 브램 스토커를 필두로 고딕의 계보를 쌓아왔다. 1970년대 후반, 펑크가 융성하고 몰락하면서 발아한 대중음악 안에서의 고딕은 현재 인더스트리얼, 다크 웨이브, 고스 록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곳곳에 중세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개인적으로 고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 때였다. 미국 문학 시간에 에드거 앨런 포의 을 원서로 읽게 된 것이다. 웬만한 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단어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무수한 알파벳들은 어둠 속의 기암괴석을 보는 듯 음산하게 늘어서 있었다. 소리를 내서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음산해졌다. 묘한 마음으로 작품을 읽어가던 중,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였던가, 한국방송 에서 이 작품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를 보여줬던 것이다. 피 한 방울 튀는 것도 아닌데 시종일관 계속되는 음산한 분위기에 그날 밤 화장실에 가지 못했던 트라우마가 책을 통해 부활했다. 교수님은 에드거 앨런 포가 고딕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말해줬고, 그제야 중세미술사에 등장하는 고딕이 단순히 건축 양식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때는 나인 인치 네일스, 마릴린 맨슨 등 고딕에 큰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빌보드를 주름잡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세기말에 고딕을 만난 것이다.
오랜 전통을 가졌고 주류 대중문화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서구에서의 고딕 문화와는 달리 한국에선 어느 날 갑자기 고딕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주류 대중문화에서 고딕이 간접적으로나마 수용된 사례가 있다면 시트콤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흡혈귀 모티브를 변주해서 시트콤의 소재로 삼은 는 등장인물들의 검은 의상과 기묘한 메이크업 등을 이슈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고딕 패션과 문화에 열광하는 이들을 잠시나마 조명받게 했다. 그러나 이 땅의 대부분 문화가 그렇듯, 시트콤의 종영과 동시에 고딕은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하다. 여전히 철저히 하위 문화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요컨대 트렌드는 있되, 스타일로 발전하지는 않는 사회 특성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관과 다름없는 세상
그런 점에서 이 ‘그레이트 고딕 트라이앵글’ 시리즈는 현대 대중문화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인 고딕을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이해시키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에드거 앨런 포의 , 이즈미 교카의 , 고골의 등 생각의나무가 펴내고 있는 기담문학 고딕 총서 시리즈는 문학적 상상력이 빚어낸 어둠의 보고다. 파스텔뮤직의 (The Mask Of Real Death)에는 모노, 키키 다키, 슈슈 등의 음악을 수록해놨다. 극단적 고딕 뮤지션들이 그러하듯, 관 속에서 바라본 세상을 그리는 팀은 아니다. 관 안에 들어간 이들을 연민하고, 관과 다름없는 세상에 괴로워하는 음악이 주로 담겨 있다. 말하자면 고딕의 수렁으로 빠져들기 위한 입문용 음악이랄까.
글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있고 음악으로 들려줄 수 있는 게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들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같은 것을 꿈꾸되,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자들의 언어는 이 시리즈를 통해 총체화된다. 어느 한 지점이라도 빠진다면 허전하기 이를 데 없을, 고딕 문화의 교두보다. 이런 식의 마케팅이라면 얼마든지 뭉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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