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기획, 아시아네트워크의 첫 결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지금 우리 앞에는 총체적 위기에 빠진 조국 버마가 있습니다. 나는 아웅산의 딸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지난 1988년 8월26일 버마(현 미얀마)의 당시 수도였던 랑군(현 양곤) 셰다곤 사원 부근. 나이와 계층, 출신 민족을 뛰어넘어 전국에서 몰려든 수십만 군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그해 버마의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민주화운동은 이날 처음 대중연설에 나선 한 여성 지도자의 출현으로 막 절정을 맞은 듯했다.
“지금의 국가적 위기는 사실상 제2의 독립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국 버마는 우리에게 새로운 독립을 위해 다시 한 번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함성은 더욱 커졌고, 그날 이후 그의 이름은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신화가 됐다. 15살에 고국을 떠나 무려 28년 만에 돌아온 버마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치였다.
그로부터 옹근 19년여 세월이 흐른 지난 9월, 버마는 다시금 민주화 열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2003년 5월부터 가택 연금된 아웅산 수치가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바리케이드로 둘러쳐진 집 밖으로 나와 시위대를 향해 합장하며 잠시 눈물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거세게 타올랐던 버마 민주화의 열망이 허망하게 잦아든 지금 되묻게 된다. 아웅산 수치는 버마 민주화운동의 유일한 희망인가?
(버틸 린트너 지음·아시아네트워크 펴냄)는 이 질문의 해답을 독자 스스로 찾아가는 데 지침서가 될 만하다. 치열한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10여 권의 버마 관련 책을 펴낸 언론인 출신인 지은이는 330여 쪽 분량의 책 한 권에 아웅산 수치의 삶의 궤적을 축으로 버마 근현대사의 정수를 오롯이 담아냈다. 1930년대 영국 식민지배에 맞선 버마 민족주의자들의 고민에서, 1960년 3월 쿠데타를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는 군사독재, 그리고 민주화 세력의 험난한 투쟁사는 고스란히 우리의 역사와 겹친다.
책을 펴낸 아시아네트워크 출판사도 눈여겨볼 만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아시아네트워크’란 이름에서 연상되는 인물이 있을 게다. 바로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다. 에서 ‘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이란 직함으로 활동하는 정 기자는 이 출판사와 ‘아시아의 눈으로 보는 아시아를 읽자’는 데 의기투합하고, 지난 2005년 11월부터 시리즈물 발간 준비를 본격적으로 해왔단다.
1989년 민주화 시위가 무참히 짓밟힌 이후 지난 19년 세월 동안 버마 국경 지역에서 민주화 투쟁을 벌여온 민주혁명전선에게 ‘아웅산 수치’와 ‘민주주의’ 두 단어는 “두 발로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에게 최고, 최후의 목표”였다. 하지만 기획자인 정 기자가 책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버마 군부는) 난폭할 뿐 아니라, 영악”했고, “닫고 풀기를 거듭한 아웅산 수치 가택 연금을 통해 장기간 ‘절망’과 ‘희망’을 반복 교차시켜 좌절감을 뽑아내는 극단적인 심리전”을 펼쳐왔다. 아웅산 수치라는 이름이 “민주사회를 열망하는 시민에게도, 그 시민을 무찔러야 할 적으로 규정해온 군인 독재자들에게도 공히 버마 현대정치사가 내린 ‘선물’이었다”는 지적은 그래서 뼈아픈 역설이다.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금,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는 버마 민중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지난 45년 투쟁사는 어떤 미래를 맞을 것인가? 지은이는 1988년과 1989년 여름 20대 젊음으로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던, 어느덧 장년이 된 ‘88세대’에게 여전한 희망을 건다. 아웅산 수치가 상징적 인물이라면, 이들이야말로 “버마의 미래를 이끌어갈 실질 세력”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버마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버마에 있는 ‘모든’ 군인이 이런 부당한 일을 지지한다고 믿지 않는다. 이는 상식을 가진 군부의 장교들이 군 수뇌부에 반기를 들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사람들의 기대가 말 그래도 ‘기대’로 끝난다면, 버마의 고통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아웅산 수치’란 신화의 명암을 추적한 이 책이 되레 버마 군부에 들이대는 ‘비수’로 읽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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