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환의 사기열전 | 역사와 지명으로 본 수도-3]
<font color="darkblue">준비 안 된 최악의 케이스는 동탁의 장안 천도… 도쿠가와 가문의 도쿄 천도는 백년대계 결단 </font>
▣ 오귀환/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서기 190년 1월 중국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를 옹립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의 공격을 받는다. 원소, 조조 등 전통적인 중원 사인세력이 그의 황제 폐위와 학정에 대해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수도 낙양 근교까지 진격해온 것이다. 오늘날의 감숙성인 농서 출신의 동탁은 자신의 근거지와 훨씬 가까운 장안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한다. 당시의 수도 낙양은 후한 시기의 수도로서 중원 사인세력의 근거지였다. 이에 반해 서쪽의 장안은 전한 시기의 수도로서 좀더 개방적이고 새외민족의 영향권과도 멀지 않았다. 서량태수 출신의 동탁은 강족 등 이른바 새외민족을 자신의 군단에 대거 흡수해 세력을 키워왔었다.
동탁, 낙양을 불태우다
서기 190년 2월 천도는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황제를 겁박해 상국의 지위에 오르는가 하면, ‘검리상전’(劍履上殿·신하가 칼을 찬 채 황제의 전상에 오르는 것)의 특권까지 가진 그는 극악한 방식을 동원했다. 가능한 한 재보는 모조리 확보하고, 옮길 수 없는 궁궐과 민가는 상대편이 이용할 수 없도록 불태워버리는 전술을 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다시는 낙양에 미련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도 작용했다. 먼저 황제를 장안으로 옮겨놓은 뒤 그는 낙양 일대에 있던 역대 황제의 능묘를 도굴하기 시작했다. 부장품을 대대적으로 약탈한 것이다. 부자들을 죽여 재물을 빼앗는가 하면 죽이지 않은 부자들은 장안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백성들도 강제 이주를 위해 끌고 갔다. 이처럼 대대적인 파괴와 방화, 강제 연행과 약탈의 아수라장 속에서 낙양은 파괴됐다.
초반부에 묘사된 동탁의 이 장안 천도는 무자비한 독재자에 의한 천도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끔찍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 천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1) 경합형 수도 논쟁의 강제적 해결방식
(2) 기본적으로 권력자의 근거지 지향주의에 따른 천도
(3) ‘준비 안 된 천도’ 가운데서도 최악의 케이스
(4) 이런 문제점 때문에 결과적으로 곧 실패작이 됨
먼저, 당시 낙양과 장안은 서로 경합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낙양과 장안은 각각 독자적인 문화와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낙양은 이렇게 표현됐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차분한 도시다. 장안만큼 시끌벅적하지도 않고 꽤나 조용한 편이다.” 장안은 다르다. “얼빠지도록 낙천적이고 화려하고 활기찬 국제도시다. 시내 거리에서는 이국인들이 낙타를 끌며 지나가고, 협객들은 어깨바람을 가르며 돌아다녔다. 도박은 장안의 주된 오락거리였다.” 오랑캐적 배경을 가진 동탁이 유교적이고 안정지향적인 중원의 도시 낙양을 싫어했음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개인의 독단에 의한 천도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편 이런 두 도시 사이의 경합 양상은 현대에 이르러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국계 도시 토론토와 프랑스계 도시 몬트리올 사이의 경합이 치열하게 벌어진 캐나다를 비롯해 시드니와 멜버른이 각축한 오스트레일리아,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가 경합한 브라질 등이 그렇다.
미래를 내다본 도쿠가와 이에야스
둘째, 이 천도가 권력자의 근거지 지향주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동탁은 장안으로 간 뒤 좀더 쉽게 농서쪽으로부터 새외민족 등 자신의 지원세력을 끌어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군사적 측면에서만 볼 때 동탁을 격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근거지 지향주의는 그로부터 1200여년 뒤 중국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와 싸워 이긴 뒤 건문제의 근거지인 남경 대신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한 사례에도 극적으로 반영된다.
셋째, 동탁이 천도를 결행할 때는 전란 중이었다. 전쟁 때 수많은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끔찍한 천도를 한 것이다. 나아가 반동탁연합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 1월, 이주를 시작한 것이 2월이다. 단 한달 만에 천도를 계획하고 실천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천도가 벌어진 셈이다.
넷째, 결국 이런 치명적인 과오와 약점으로 천도 자체도 곧바로 실패하고 만다. 동탁의 사후 장안은 부하 장군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그나마 서기 196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을 거쳐 조조의 허창으로 들어감으로써 수도의 지위마저 상실한다. 장안 천도 6년 만의 일이다. 그 뒤 장안은 400년쯤 지나서야 수나라와 당나라의 수도로서 부활한다.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쿄(에도) 천도는 동탁의 장안 천도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치밀한 계산과 준비를 거친데다 기본적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프로젝트로서 실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장안과 도쿄의 운명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갈라진다.
서기 1590년 7월 새로운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종해야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새로운 영지 에도에 들어간다. 그를 견제하는 히데요시의 영지교체책에 따라 종래의 거점 영지에서 밀려나 동쪽 변방 관동평야의 미개척 영지로 강제로 이주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에도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톱밥을 이겨 만든 초가 지붕에는 농성하던 병사들이 불붙은 화살을 만든답시고 흙을 발라놓았다. 그 바람에 흙이 섞인 빗물이 흘러내려 다다미가 썩고, 집이 무너져 갈라진 지붕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현관 계단은 선창 판자 두장을 얼기설기 묶어둔 조잡한 것이었다. …에도는 바다와 강과 연못이 산재한 물투성이 땅이었다. 개척지였다고는 하지만 예로부터 갈대와 억새가 우거진 습지와 황량한 들판이 이어진 드넓은 평야였다. 에도성은 히비야 후비 구릉지대 끝부분에 있었고, 제방은 바닷물에 씻겨나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 일본의 새로운 패자가 되어 막부통치를 시작한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처럼 최고 권력자가 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문에 억지로 내놓아야 했던 옛 영지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가문의 백년대계를 위해 새로운 땅 에도 일대를 선택한다. 그 결과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를 거쳐 오늘날 일본의 수도로까지 비상하게 된다. 1600년 초 도쿠가와 가문의 백년대계 결단이 21세기 세계도시 도쿄를 낳은 것이다.
“다이묘를 교묘히 견제하라”
도쿠가와 가문의 도쿄 천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철저한 계획도시 건설
(2) 경제부흥책으로 신도시 건설 활용
(3) 다이묘 견제정책과 도쿄발전 정책을 교묘히 결합시킴
(4) 낙후된 동일본 지역의 개발을 촉진해 국토 균형발전을 이뤄냄
(5) 도로망과 해상운송망의 발전으로 내수기반 갖춤
첫 번째, 도쿄는 철저한 조사와 계획을 토대로 점진적으로 건설됐다. 도쿠가와는 에도에 입성하기 전에 이미 이 지역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다. 이주 뒤에도 탁발승, 행상인, 예능인들을 동원해 조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곳에 왕도를 건설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상황에 떠밀려서 도시를 건설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훨씬 멀리 내다보고 주도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조사를 토대로 간척과 매립, 성곽 축조, 거주지 조성, 항만 건설 등이 이뤄졌다.
두 번째, 무엇보다 과거의 왕도 대신 새로운 왕도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경제적 판단도 크게 작용했다. 조선 침략의 실패와 내전 등으로 피폐해진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새 도시 건설이 대단히 유용하다고 본 것이다. 무기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새 성곽과 궁궐, 도로, 주택의 건설은 새로운 기회였다. 건설경기는 고용창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였다.
세 번째, 도쿠가와 가문은 다이묘들에게 새 왕도 건설에 물자와 인력을 제공토록 했다. 그들의 경제력을 축소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노린 것이다. 나아가 다이묘들의 가족을 에도에 의무적으로 들어와(사실상의 인질로서) 살도록 한다. 또한 참근교대제를 도입해 다이묘들이 1년은 에도에서, 1년은 영지에서 살도록 한다. 다이묘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한편 도쿄의 비약적 발전에도 기여하도록 한 것이다.
네 번째, 당시 관동평야의 에도조차도 그토록 전란과 다이묘들의 무관심으로 방치될 정도로 일본은 불균형 발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에도의 건설은 이런 불균형 상태를 극적으로 해소하고 일본 전역이 고루 발전하는 자극제가 됐다.
다섯 번째, 다이묘에 대한 견제책으로 대대적인 영지교대제를 실시하면서 일본의 교통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엄청난 인구가 인위적으로 대거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막부의 강력한 주도 아래 새로운 도로와 하상교통망이 개설돼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한다. 궁극적으로 이런 기반시설의 확충이 개국 이전 일본의 내수산업을 상당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장 극적인 과정 보여주는 베를린
서양 국가의 천도에서 가장 극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수도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베를린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은 간단하게 보더라도 수도- 분할 - 수도 지위 상실 - 도시 통합 - 수도로의 복권 등 복잡한 운명을 헤쳐온 도시다.
처음 베를린이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1244년부터다. 베를린은 자매도시라 할 수 있는 쾰른과 함께 13세기 초 건설됐다. 두 도시는 스프리강을 매개로 동서 유럽 사이의 교역을 주도하면서 발전했다. 맨 먼저 베를린의 현재 중심지역인 스판다우와 쾨페닉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살다가 8세기 무렵 베를린과 쾰른 지역에 요새형 거주지가 들어선다. 1411년 브란덴부르크 변경지역은 뉘른베르크 봉건귀족 프레드릭 6세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이 무렵부터 베를린-쾰른은 독일 역사에서 비록 공국 수준이기는 하지만 수도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이 무렵 도시 인구는 1만2천명에 이른다.
1640년 프레데릭 빌헬름이 권력을 잡은 뒤 스웨덴 침략자를 막기 위해 요새시설을 크게 강화한 건축계획을 추진한다. 빌헬름은 운하건설에도 박차를 가해 주변 도시와 연결되는 해상교통망을 갖춘다. 1701년 프레데릭 3세가 현재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러시아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베를린은 황궁도시로 결정된다. 1712년 베를린-쾰른과 그 주변도시의 인구는 모두 6만1천명 수준으로 늘어난다. 18세기 내내 베를린은 이처럼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팽창을 거듭한다.
19세기 초반부터 베를린은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로서 발전한다. 훔볼트대학 등 대학들이 본격적으로 건립되고 헤겔, 마르크스 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무렵이면 도시는 40만 수준을 웃돌게 된다. 산업혁명과 함께 독일의 강대국화도 급속도로 빨라진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프러시아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이다. 그의 주도로 1871년 드디어 전 독일이 통일된다. 이때 독일제국의 수도인 베를린의 인구는 82만명 수준에 이르렀다. 베를린의 국제도시로의 발전도 가속화돼 20세기까지 프랑스인, 유대인, 네덜란드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오스트리아인, 터키인 등이 계속 이주해온다.
20세기 들어 독일과 베를린은 우연의 일치로 모두 네 차례에 걸쳐 10월9일마다 역사적인 대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맨 먼저 1918년 10월9일 베를린은 독일공화국의 첫 번째 수도로 결정된다. 그 5년 뒤 같은 날 히틀러가 뮌헨에서 정부의 전복을 시도한다. 결국 진압됐지만, 히틀러의 야심은 저지할 수 없었다. 1938년 10월9일 나치 돌격대가 유대교 회당 및 유대상점 습격사건을 일으킨다. 바로 ‘크리스탈나흐트’(부서진 유리의 밤)로 불리는 사건이다. 그 뒤 1989년 10월9일에는 동독이 28년 동안 동서 베를린을 분단시켜온 베를린 장벽을 철거한다.
독일 10월9일의 기이한 연쇄 체험
이런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베를린은 기구한 운명의 역정을 거쳐왔다. 동서 베를린으로 분단돼 있을 때,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은 반면 서독은 본을 수도로 두어야 했다. 서베를린이 동독 영내에 섬처럼 고립돼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 뒤 베를린은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로 부활한다. 과연 베를린의 고난은 끝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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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 오프 항해지도]</font>
▶ 중고생
- 도몬 후유지/작가정신
오와다 데쓰오/청어람미디어
세토 타쓰야/애니북스
진순신/한길사
▶▶ 대학생 이상
- 고마쓰 겐이치/이와나미서점(일본책)
www.britannica.com=tokyo/xian/berlin
동경서적Z(일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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