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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실크로드] “세계의 모든 깃발을 휘날려라”

등록 2004-12-02 00:00 수정 2020-05-03 04:23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역사를 바꾼 길4]

<font color="darkblue">기원전 3천년 전부터 개척된 바다의 실크로드… 종교전쟁 위기 직면한 세계 최대의 원유 수송로 </font>

▣ 오귀환/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운송은 문명이다(Transportation is civilization).”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1980년 중동의 오만 정부는 고대 바다의 실크로드를 재현하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 옛날 아랍인들이 사용하던 범선과 똑같은 배를 제작해 걸프해의 주요 출항지였던 소하르(Suhar)를 출발해 중국의 광저우(광주)까지 항해하는 것이다. 165일 만에 완성된 27m 길이의 옛 범선은 ‘소하르’라고 명명됐다. 10세기 무렵 아랍권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이 출항지를 기리기 위해서다. 소하르는 1981년 1월 페르시아만의 항구를 떠나 7월11일 광저우에 도착했다. 6개월 만에 9656km를 항해한 것이다. 놀랍게도 소하르는 옛 기록과 거의 일치한 항해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대 아랍인들의 항해술과 바다에 대한 정보가 그대로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연안을 따라 곳곳에 무역기지를 건설하다

동양과 서양을 이으려는 인류의 시도는 처음 육지를 통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실크로드다. 그러나 바다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위험성이 있음에도 (1) 물동량을 극대화할 수 있고 (2) 화물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측면 등으로 인해 훨씬 더 매력적인 길로 부상한다. 문명의 길, 바다의 실크로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고도 광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께에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바빌로니아와 인도가 바다를 통해 직접 교류한 흔적이 있다고 밝힌다. 무려 5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따라 내려가 오늘날의 소말리아 지역인 푼트에 이르는 항로가 개척된 것도 기원전 2500~30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인들은 육로보다 이 항로가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곳곳에 무역기지와 보급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이집트의 배들은 나일강의 동쪽 지류를 따라 비터호를 경유, 홍해로 빠져나온 뒤 푼트까지 가서 금, 상아, 흑단, 가구용 목재, 향, 계피, 가죽 따위를 싣고 다시 나일강의 항구로 돌아왔다. 그 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이집트에 건설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이집트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상인들이 홍해의 항구로부터 아라비아 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한다.

로마제국의 등장은 이런 고대 인도 항로의 비약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특히 기원전 1세기 중엽 로마 항해사 히팔루스가 아라비아해의 계절풍을 이용해 안정적이고 주기적으로 인도를 항해하는 방식을 개발해 동서 항로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상인들은 7월 이집트를 출발해 계절풍을 타고 9월 말 인도의 항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시 11월 말 인도에서 귀로에 올라 2월이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기 160년 무렵까지는 이 동방 항로가 중국까지 이어진다. 당시 비단은 아직 주로 육로의 실크로드를 통해 로마로 들어갔지만 향수, 향료, 후추, 보석, 약, 진주, 상아, 면화, 무명, 가죽, 티크목재 등 인도산 물품들은 바닷길을 통해 이집트나 이라크 지역으로 간 뒤 다시 로마로 운송됐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는 시도도 이어졌다. 이미 서기 1세기 무렵 중국의 내륙으로부터 바다의 실크로드를 거쳐 이집트와 중동 지역으로 나아가는 항로가 활성화됐다. 첫 번째 길은 중국의 낙양으로부터 사천성 성도로 나아간 뒤 양자강을 타고 운남으로 가서 다시 버마의 이라와디강을 거쳐 인도까지 진출하는 길이다. 인도나 실론에서 다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홍해로 진입해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두 번째 길은 중국의 광동 지역에서 베트남의 하노이를 거쳐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경유해 말라카해협을 돌파한 뒤 인도로 가는 길이다. 인도에서는 다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페르시아만으로 진입해 페르시아 지역으로 가거나 유프라테스강을 타고 올라가 바그다드까지 간다. 중국의 역사서 에 나오는 “대진국왕(大秦國王·로마황제) 안돈(安敦·안토니우스)이 바친 상아”라는 것이 바로 이런 항로를 거쳐 중국까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 중국의 대로마 수출품이던 비단을 비롯해 가죽, 계피, 대황 등이 이 길을 통해 이동했다. 로마로부터는 유리, 모직물, 아마포, 진주, 홍해산 산호, 발트해의 호박, 상아, 꼬뿔소 뿔, 대모, 석면, 향유, 약품 등이 중국에 밀려들어왔다.

도자기·향신료, 전적으로 바닷길에 의존

바다의 실크로드는 일찍부터 도자기와 향신료의 교역로이기도 하다. 운송 과정에서 파손될 위험이 높고 중량도 무거운 도자기를 나르는 데 배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인도와 동남아 일대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를 아랍과 유럽 지역으로 대대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배와 항구가 발달하게 된다. 육상교통의 위험과 복잡성 때문에 열대와 아열대산 향신료는 거의 전적으로 바닷길에 의존해야 했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도자기의 길’이자 ‘향신료의 길’이었던 것이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또한 ‘종교의 길’ ‘문명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해 불교의 많은 고승과 순례자들이 오가면서 인류 정신문명의 지평을 넓혔다. 5세기 초 중국 동진의 승려 법현은 육상의 실크로드로 인도에 들어갔다가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돌아와 를 남겼다. 서기 671년에는 당나라의 승려 의정이 뱃길로 인도에 들어간 뒤 25년 만에 역시 뱃길로 돌아와 (南海寄歸內傳)과 (大唐西域求法高僧傳) 등 여행기 2권을 남겼다. 이슬람교도 이 바닷길을 이용해 전파됐다. 처음 중국까지 진출한 아랍 상인들은 경유지인 동남아시아 일대에 포교를 하기 시작해 마르코 폴로의 시대인 13세기 말 오늘날 인도네시아 지역인 수마트라 북부가 이미 이슬람화됐다. 1세기 뒤 말레이반도 서안의 말라카왕국도 이슬람화됐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말에 이르는 100여년 동안 말레이반도의 파타니왕국과 케다왕국, 보르네오 북부의 브루나이왕국, 필리핀 남부의 수르왕국과 민다나오왕국, 자바 서부의 반텐왕국,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왕국 등이 잇따라 이슬람화한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무대로 한 동양의 활약이 15세기 중엽 명나라 제독 정화의 7차례에 걸친 대항해로 절정을 이룬 뒤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 등 유럽국가의 동양 진출이 이어진다. 동서양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고, 다시 1519년부터 1522년까지 마젤란의 스페인함대가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이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해 곳곳에 두 나라의 중계기지와 식민지가 생겨났다. 포르투갈은 희망봉과 페르시아만의 아시아 서부지역, 인도, 티모르, 중국, 일본 등지로 급속도로 세력을 팽창해나갔다. 스페인은 스페인대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중국 진출을 시도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아시아를 먹다

그러나 서양 세력의 아시아 진출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세력은 영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신항로가 열린 지 80여년이 지난 1586년에도 100t 이상의 배는 스페인 104척, 포르투갈 9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1582년 잉글랜드의 각 항구에는 177척이 등록돼 있었다. 또 스페인은 왕가나 국민이나 모두 라틴아메리카의 금광이나 은광에서 쏟아져나오는, 거저 얻는 성격의 부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잉글랜드쪽은 강력한 상인의식으로 무장한 채 장기적인 이익의 창출을 노렸다. 결국 잉글랜드는 강력한 해군력과 재정력을 바탕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네덜란드 역시 (1) 해양국가로 발전하는 데 유리한 지리적 이점 (2) 현명한 상술 (3) 교묘한 금융기법 (4) 과도할 정도의 욕심에 바탕한 도전의식 등에 힘입어 아시아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아시아 진출에 박차를 가해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제국주의 시대 바다의 실크로드는 유럽국가에는 부와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아시아 국가에는 고통과 분노의 원천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 바다의 실크로드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계적인 교역로로서 과거에 누렸던 영광을 회복하는 한편 세계적인 원유 수송로라는 새로운 전략적 중요성이 더해진 것이다.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동아시아의 막대한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중동산 원유가 이동하는 에너지의 대동맥이 됐기 때문이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현재 세계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원유와 물동량이 통과하는 항로다. 특히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침략에 따라 전세계적으로 종교전쟁이 심화·확대되는 양상을 보여 바다의 실크로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폭발의 위기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총 6천여km에 이르는 구간 가운데 가장 좁은 호르무즈해협과 말라카해협이 쉽사리 테러리즘의 위협 아래 놓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이슬람 정권의 등장 등 새로운 변수에 따라 해협 봉쇄라는 극단적인 상황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과연 바다의 실크로드는 이런 종교전쟁의 위기를 벗어나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라는 과거의 찬사를 누릴 수 있을까?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1816~1892)은 자신이 바라는 바다의 꿈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 바다여, 세계 모든 나라의 깃발을 나부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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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열도에서 양자강까지!</font>



바다의 실크로드를 여행한 우리 민족 인물들의 첫 기록은 7세기 말~8세기 초 배를 이용해 천축(인도)을 방문한 당나라의 승려 의정의 이다. 이 책에는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현진’(玄進), ‘현태’(玄太), ‘현각’(玄恪), ‘혜륜’(慧輪), ‘현유’(玄遊), ‘혜업’(慧業) 등 신라와 고구려의 구법승 8명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당시 불법의 진리를 찾아 목숨을 걸고 천축으로 가 수도하던 승려들이다. 이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들은 중국의 광동에서 배편으로 교주(베트남의 하노이)를 거쳐 수마트라에 갔고, 다시 수마트라 동남방인 팔렘방에서 배편으로 그 서방인 파로사국에 이르러 불행히도 병사했다.” 이와 달리 고구려의 현유는 스승인 승철 선사를 따라 동남아시아 항로를 이용해 천축의 불교 성지를 두루 순례하고 실론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그 직후 신라의 승려 혜초가 바다의 실크로드로 천축에 들어가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육로로 파미르를 넘어 당나라로 돌아온다. 그 여행기가 이다.
그 뒤 생활고 등으로 신라를 떠나온 사람들이 중국 양자강 유역의 국제항 양주 등지에 밀집해서 살면서 ‘신라방’이 형성된다. 양주의 경우 당나라 당시 바다의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역으로서 외국 상인이 빈번하게 오가는 대항구인데다, 계절풍을 타면 우리나라의 흑산열도까지 사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신라인의 진출이 활발한 곳이었다. 한편 장보고의 청해무역선단의 활동 등으로 신라의 청해진, 울산 등도 바다의 실크로드에 본격적으로 편입돼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국제도시로 변모한다. 의 주인공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주장은 이런 배경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무렵 아랍과 페르시아 학자 17명이 쓴 20여권의 책에 신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국제적인 항구도시의 전통은 왕족까지 나서 해양활동을 장려한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나, 쇄국주의 기조를 유지한 조선조부터 그 맥이 끊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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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 오프 항해지도]</font>


▶ 중고생
- 양승윤 외/청아출판사

▶▶ 대학생 이상
- 정수일/창작과 비평사
어니스트 페일/혜안
시공사
상해사회과학원출판사(중국책)
〈 Crude Awakenings 〉 Steve Yetiv/Cornell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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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ING SOON]</font>

자료제공, 도움말씀 기다립니다.
okh1234@empal.com

▶ 다음호: 수도론 1- 지명과 역사로 본 역사 속의 수도들

▶▶ 다다음호: 수도론 2- 역사 속의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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