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혁명가 4 - 체 게바라]
<font color="darkblue">20세기가 낳은 가장 인간적인 혁명 게릴라의 한 사람인 체 게바라… 죽어서 영원한 전설을 남기다 </font>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한 백인 중산층 집안의 소년이 우연히 길에서 사귄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친구네는 단 하나의 침대만 있는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었다. 얼마나 가난한지 겨울에도 난방은커녕 신문지나 넝마 조각으로 추위를 가리려 할 정도였다. 사람이 그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소년의 가슴을 울렸다. 그 뒤 소년은 자주 굶주린 친구들이나 광부의 아이들, 호텔 노동자의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재웠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소년의 집은 해방공간과도 같은 곳이 돼갔다. 성장해서 의과대학을 졸업할 무렵 소년은 선배 한명과 함께 500cc짜리 모터사이클 한대로 라틴아메리카를 종단하는 여행에 나선다. 조국 아르헨티나를 출발해 칠레,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콜롬비아를 거쳐 베네수엘라에 이르는 1만km를 주파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역사를 온몸으로 끌어안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존의 나환자와 라틴아메리카
195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는 전통적인 과두지배 계급의 독재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짓눌려 고통받고 있었다. 지나는 나라마다 민중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수탈당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소년은 이 여행을 겪으며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라고 확신한다. 이 라틴아메리카 종단여행에서 소년 일행은 운명적인 한 만남을 경험한다. 그 장면을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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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유역에 있는 한 ‘치유 불가능한’ 중증 나환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찾아 들어간 두 사람은 열심히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봤다. 소년은 나환자 한명을 설득해 오른쪽 팔꿈치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집도하게 된다. 이 인디오 나환자는 온전한 살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채 나머지 신체도 계속 나병균에게 야금야금 파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곪은 상처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데다 높은 열까지 겹쳐 이미 다른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내린 뒤였다. 그러나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신경이 살아 있으니까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고 말아요.’ …결국 수술은 성공하고 환자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수술 소식을 듣고 감동한 나환자들은 소년의 24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조촐한 댄스파티를 열어준다. 소년은 댄스파티에 참석한 인디오 처녀들과 각각 24번씩 포옹한다. 어떤 처녀는 나환자가 아니었지만 어떤 처녀는 나환자였다. 인디오들은 나환자일지라도 가족과 헤어지지 않은 채 함께 살려 했다. 그 때문에 감염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인디오들은 그런 삶을 피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 가족이기라도 하듯이 이 모든 이들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20세기가 낳은 가장 인간적인 혁명게릴라의 한 사람인 그는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 그런 특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1952년 6월 아마존 나환자촌의 경험은 그 뒤 게바라의 삶을 결정짓는 중대한 상징의 모티브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바라, 그는 그때 나환자들을 끌어안았던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을 뜨겁게 사랑했다. 그때 오직 수술만이 그 나환자를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의 불행과 모순은 미국 제국주의와 과두지배 계급의 독재를 무너뜨려야 해결된다고 결론지었다. 의사 출신의 혁명가였던 게바라에게 라틴아메리카를 살리는 수술은 바로 무력혁명이었으며, 그 수술의 도구는 게릴라 전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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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이자 게릴라로서 게바라는 대략 다음과 같은 네 시기를 거치고 있다.
(1) 쿠바혁명 동참: 1955~59년
(2) 혁명정권의 유능한 행정가이자 게릴라 전술의 이론가: 1959~65년
(3) 혁명 게릴라들의 국제주의 전선 실험: 1965~66년
(4) 라틴아메리카 동시혁명 시도와 그 좌절: 1966~67년
놀라운 능력과 지성, 그리고 유머
게바라가 맨 처음 본격적으로 맞닥뜨린 혁명은 쿠바혁명이다. 그는 1955년 멕시코에서 쿠바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그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 혁명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게바라는 가난한 사람과 약자에 대해 이상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에 대해선 냉철할 정도로 무력투쟁론에 집착했다. 게바라는 모터사이클 여행의 동료였던 알베르토 그라나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기도 없이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형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군.”
또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쓴 것도 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해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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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카스트로 형제는 쿠바의 바티스타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병영을 습격한 이른바 ‘몬카바 병영 습격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수감됐다가 풀려나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제는 동지들을 규합해 다시 쿠바로 들어가 게릴라전으로 바티스타를 전복시킬 계획이었다.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렸다. 그 뒤 두 사람은 게바라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속시켜나간다.
멕시코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카스트로의 무장혁명군 82명은 드디어 1956년 11월 그란마(스페인어로 할머니라는 뜻)라는 이름의 하얀색 요트를 타고 쿠바로 출항했다. 그러나 혁명군은 그란마호가 상륙 예정지로 돼 있던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해안에 좌초하고, 쿠바 정부군에도 발각돼 공격받는 바람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상당수 대원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붙잡힌 것이다. 결국 살아남은 10여명이 정글로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쿠바 민중들은 독재적인 바티스타 정권 대신 카스트로의 혁명군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다. 그 결과 혁명군은 곳곳에서 잇따라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서 세력을 확장해나간 끝에 결국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다.
쿠바혁명 성공 뒤 게바라는 전권대사, 국립토지개혁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혁명정권의 기초를 닦아나갔다. 특히 그는 직관력과 학습, 두 가지를 무기로 경제 분야의 주요 현안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먼저 게바라는 온건파와 권력을 분점하는 상황 때문에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던 대토지 사유제를 종식시키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와 함께 각종 개혁정책의 추진과 집행에 속도를 가했다. 또 미국이 쿠바의 새 정부에 대해 곧 경제봉쇄 등 적대적 정책을 취할 것으로 보고 치밀하게 대책을 세워나갔다. 미국이 쿠바의 주수출품인 사탕의 수입을 격감시키거나 중단하고, 쿠바에의 원유 공급을 거부하고, 미국산 공산품의 쿠바행을 막을 것에 대비해 소련 등 공산권과의 교역 루트를 확보했다.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이자, 게바라에 대한 미국의 공세는 더욱 강화됐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은 이렇게 보도하기조차 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현재 쿠바의 얼굴이자 목소리이며 정신이다. 그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혁명을 위해 뽑은 단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게바라는 두뇌이다. 그는 이 삼두마차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여자들을 홀리기에 딱 좋은, 우수가 묻어나는 미소를 입꼬리에 흘리면서 체 게바라는 냉정하고도 치밀한 방식으로 쿠바를 이끌고 있다. 놀라운 능력과 지성, 그리고 세련된 유머로서.”
다시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로…
쿠바혁명을 수호하는 이런 활동과 함께 게바라는 1960년대 동안 각종 연설과 저술 등을 통해 혁명이론을 체계화시킨다. 그 결과 몇몇 유명 저작들이 생산된다. <쿠바의 인간과 사회주의>(1965), <게릴라전>(1960) 등이 이런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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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분주하면서도 다양하게 쿠바혁명을 위해 활동하던 그는 1965년 4월 갑자기 공석에서 사라진다. 그가 찾아간 곳은 아프리카의 콩고(옛 자이르), 사회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이 벌이는 내전에 직접 몸을 던지고 나선 것이다. 그는 쿠바 게릴라 출신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콩고의 좌파 세력인 파트리스 루뭄바 여단의 조직 결성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루뭄바의 계승자들이 쿠바인들의 철수를 요구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는 바람에 결국 큰 성과 없이 이 아프리카 실험을 마감한다.
게바라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땅은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나라 볼리비아, 1966년 가을의 일이다. 볼리비아는 안데스산맥과 아마존강 사이에 자리잡았고 그 주위에 페루,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삥 둘러싸고 있다. 이론적으로 여기서 혁명이 성공하면 주변 국가들로 진출할 기회와 가능성이 훨씬 커지게 된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인을 비롯해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 그리고 일부 유럽인까지 포함된 국제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결국 이 게릴라 전쟁은 실패하고 만다. 1967년 10월 볼리비아 특수군에 포위된 게바라의 게릴라 부대는 괴멸적 피해를 입고, 게바라 자신도 부상당한 채 붙잡힌다. 볼리바아군은 곧 그를 처형한다.
15년 전 게바라가 아마존 나환자촌을 떠나기 전날 나환자촌의 인디오들은 작별인사를 해준다며 악대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를 찾아왔다.
“아코디언을 타는 사람은 오른손에 손가락이 하나도 남지 않아 손목에 대나무를 이어놓았더군요. 그 대나무 손으로 연주를 하는 거예요. 노래를 맡은 가수는 장님이고요. 다른 이 대부분도 이 지방 나병의 특징인 신경계 이상에 따라 모두 비정상적인 모습들을 하고 있어요. 그런 이들이 호롱불에 의지해 연주를 이어가는 것이지요. …아마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게바라는 죽어가며 이 나환자의 인디오들을, 그들이 선물한 선율을 마지막으로 기억했을까? 그는 죽어서도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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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방자가 아니란다”</font>
“나는 해방자가 아니란다. ‘해방자’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민중을 해방시키는 건 그들 자신이란다.”(1959년 쿠바혁명 성공 뒤 한 소년 전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2년이 걸린다는 그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에 시에라의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굶어죽고 말 걸세. 이건 의사로서 자신 있게 하는 말일세. 그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일일세.”(혁명 초기 온건파 행정관료들이 제시한 프로그램을 비판하며)
“그것(임금을 노동생산성과 상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자극제이다. 이 자극제 대신에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할 수 있는 윤리적 자극제로 대체돼야 한다.”(프랑스의 좌파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샤를 베틀랭과 토론하며)
“학문에 취미가 없다면 손을 쓰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 야채밭에서 일을 해라.” (게릴라 출신으로 행정부에서 일하게 된 부하들을 교육하면서 징벌 조치를 내리며)
“우리의 유일한 자본은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있는 무장한 민중입니다. 우리는 이 자본으로 우리의 토지개혁을 실행할 것이며, 그 힘을 심화할 추진력으로 산업화의 길에 진입할 것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선 우리를 분열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을 각각 커피, 구리, 석유, 주석, 사탕수수 생산국으로 나눠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시장을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멸시킬 더 낮은 가격으로 한정 없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1960년 교육시의 건설에 참여한 국제여단을 치하하는 연설에서)
“가난한 나라의 인민들이 피와 땀이 마르도록 생산한 1차 상품을 국제시장 가격으로 팔고, 최신식으로 자동화된 거대한 공장들이 생산한 기계들을 국제시장 가격으로 사는 일을 과연 호혜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하고 있다고 결론내려야 할 것입니다.”(1965년 2월 알제리에서 열린 제2차 아프리카-아시아 세미나에서)</font></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r><tr><td colspan="5"></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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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 오프 항해지도]</font>
▶ 중고생
-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실천문학사
<체 게바라-20세기 최후의 게릴라> 시공디스커버리총서/시공사
▶▶ 대학생 이상
- <체 게바라 자서전> 체 게바라/황매(사진)
<체의 마지막 일기> 체 게바라/지식여행
<poemas al che> LosLibrosDeLa Frontera
비디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www.yahoo.com=(검색)=che
www.che-lives.com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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