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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워싱턴] 침략자의 발 아래 단단해지다

등록 2004-12-17 00:00 수정 2020-05-03 04:23

[오귀환의 사기열전 | 역사와 지명으로 본 수도-2]

<font color="darkblue"> 조국의 생존을 위해 희생물이 되기도 했지만 끝내 부활한 모스크바와 워싱턴</font>

▣ 오귀환/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로키산맥의 인디언들은 독특한 늑대사냥법을 가지고 있었다. 왼팔에 두꺼운 보호대를 댄 뒤 늑대에게 물리도록 하고 오른손에 있는 무기로 늑대를 공격해 죽이는 사냥법이다. 최종 승리를 위해 희생물로서 적에게 내어주는 존재인 왼팔…. 역사상 이 왼팔과 가장 닮은 도시가 있다. 바로 모스크바다. 13세기 몽골족을 시작으로 타타르족, 폴란드군, 프랑스군, 독일군의 침략을 겪은 도시, 이런 전쟁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내어주는 희생물이 되기도 했지만 끝내 다시 부활했던 도시가 여기 있다.

수시로 모스크바를 짓밟은 몽골

모스크바는 서기 1147년이 되어서야 역사서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수즈달공(prince of Suzdal)인 유리 블라디미르비치 돌고루키가 동맹세력인 노브고로드공 세베르스키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저 유명한 ‘대만찬’을 연 것이다. 그 뒤 1156년 돌고루키는 모스크바강과 그 지류 사이의 삼각형 지역에 토벽과 해자로 방어망을 구축한 요새 크렘린을 세웠다. 블라디미르 수즈달공국의 주요 도시가 된 모스크바는 상업지역이 조성되는 등 발달한다. 그 뒤 1236~40년 러시아 전역을 휩쓴 몽골군의 침략을 받고 함락됐다. 공국은 몽골의 속국이 되고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공국은 1293년 다시 몽골군의 침략을 받고 약탈됐다. 그로부터 3년 뒤 크렘린은 동쪽에 새로운 방벽을 세우고 자작나무 방책도 완성했다. 새로운 방어망을 갖춘 도시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모스크바는 점차 중요성을 인정받고 상업 및 수공업 중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카강과 볼가강 사이에 펼쳐진 모스크바 동쪽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땅이 매우 비옥했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가 농업 중심 도시로 발달하는 것을 촉진했다. 1326년 러시아정교회가 블라디미르로부터 모스크바로 옮겨오면서 이 도시는 러시아의 정신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도 획득하게 된다. (1453년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군에 함락된 이후로 모스크바는 스스로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로마가 제1의 로마라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제2의 로마, 그 다음 동방교회의 중심지로 부상한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논리다.)

모스크바는 초기 몽골군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는 러시아 공국들의 중심세력으로서 세력을 확장해갔다. 그 결과 몽골군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 또다시 함락되는 등 러시아 민족의 수난사에서 늘 맨 앞머리에 나오는 도시가 된다. 1382년 몽골군 침략 때에는 도시가 함락됐지만, 1408년에는 예데게이 칸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몽골을 물리친 도시’로서의 모스크바는 전략적 중요성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주변 공국들을 흡수 합병하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된다. 드디어 1478년 라이벌이던 노브고로드공국을 합병해 러시아 민족 통일국가의 수도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도시는 방어망을 확장하고 새로운 궁전과 상업지구, 수공업지구, 거주지 등을 갖추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지나간 자리

하지만 모스크바는 그 뒤로도 외적의 침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571년 크림반도를 근거지로 하는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았다. 그 결과 크렘린을 제외한 도시 전 지역이 점령돼 20만 인구 가운데 3만명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도시는 다시 새로운 성곽을 쌓는 등 방어망을 강화했다. 1584년부터 1592년 사이에는 ‘벨리 고로드’(하얀 도시라는 뜻)라는 부도심 지역에 8km 길이의 돌 성벽을 더 쌓았으며, 도시 외곽에는 50개의 망루를 갖춘 순환형의 대규모 흙성벽을 또다시 세웠다.

그러나 17세기 초 드미트리공 가문이 두 차례에 걸쳐 폴란드군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모스크바는 다시 외적의 지배 아래에 놓이기도 했다. 폴란드군을 물리친 뒤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도시 빈민들의 생활은 어렵기 짝이 없어 자주 반란으로 이어지곤 했다. 1648년 소금세 증액 문제로 반란이 일어나고, 1662년에는 ‘구리 반란’이 일어났다. 1667년 러시아 남부에서 스텐카 라진의 반란이 일어나자 모스크바에서도 여기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결국 스텐카 라진의 반란은 진압되고 라진은 모스크바에서 처형된다.

1701년 전제적인 표트르 1세가 핀란드만에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모스크바는 일시적으로 쇠퇴하기도 했으나 곧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되찾았다. 그 결과 18세기 말엽 모스크바에서는 300개의 공장이 가동하게 된다. 1811년 도시 인구는 27만5천여명에 이른다.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러시아를 침략하자 모스크바는 다시 러시아 민족의 ‘희생양’으로 승화한다. 전략적 승리를 위해 전술적으로 적에게 내어주는 운명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러시아의 초토 작전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러시아군은 철수하고 시민들도 완전히 소개된다. 그리고 도시에는 화재가 일어나 도시 전체 건물의 3분의 2가 붙에 타버린다. 겨울이 되자 프랑스군은 식량과 보급품, 난방이 지원되지 않아 후퇴하기에 이르고 결국 궤멸적 패배를 맛보게 된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이후 모스크바는 다시 소련의 수도가 된다. 그 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는 다시 한번 적군의 공세 아래에 놓인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모스크바까지 육박해오자 소련 정부는 공장과 정부기관을 전부 동부 지역으로 소개하고, 모스크바에 계엄령을 선포한 채 항전한다.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 공군이 계속 공습을 퍼붓는 가운데 시민들은 도시에 탱크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도시를 지킨다. 결국 독일군은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한다.

어수선한 연방의 수도를 정하다

냉전을 통해 소련을 패퇴시킨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모스크바에 비해 역사가 매우 짧다. 짧은 만큼 곡절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다. 워싱턴의 역사도 나름대로 꽤 흥미롭다.

1776년 7월4일 미국의 독립선언 당시 워싱턴은 아직 미국의 수도가 아니었다. 미국의 독립은 13개 주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공포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게다가 초기 국가 형태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13개 주의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Confederation)로 시작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도의 개념조차도 1783년 6월 필라델피아의 옛 시청에서 열린 대륙회의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재정은 빈약했고, 새 국가는 대외 채권을 발행할 여력이 없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 정부는 독립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엄청난 급여 채무를 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1783년 6월20일 급여를 받지 못한 한 떼의 군인들이 의회에 탄원서를 낸다는 명목으로 필라델피아에 진입한다. 당시 유혈 사태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 의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연방의 수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이런 위협적인 분위기가 없는 상태에서 새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그 뒤 6년여 동안 의회는 여러 후보 지역을 놓고 토론을 거듭했다. 남부 출신 의원과 북부 출신 의원들은 번번히 이견을 드러내곤 했다. 이런 이견 속에서도 대체적으로 포토맥강 어름에 수도를 둔다는 정치적인 타협이 이뤄졌다. 결국 정확한 수도의 위치를 결정하는 일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조지 워싱턴에게 맡겨졌다. 낙점된 행정구역(District)은 북으로는 조지 타운을, 남으로는 알렉산드리아를 면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당시 새 수도 부지의 상업적 잠재성을 고려했다. 워싱턴이 끼고 있는 포토맥강은 주요한 담배시장이 개설돼 있는 조지타운까지 배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쿰버랜드 갭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면 당시 막 이주자들이 진출해 들어가기 시작한 광대한 ‘서부 지역’이 연결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수도의 부지를 결정하기 전에 워싱턴은 개인적으로 운하건설회사까지 세웠으나 곧 이 회사에 걸린 자신의 지분을 처분했다.

워싱턴은 이와 함께 민주당의 이상주의자이자 우수한 엔지니어인 피에르 샤를르 렁펑에게 수도건설 계획을 수립하도록 의뢰했다. 그는 이 계획의 중대성을 금세 알아차리고 더 거대한 계획으로 발전시켰다.

1793년 9월 워싱턴이 수도의 표석을 처음으로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백악관 등의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백악관은 아일랜드 출신인 제임스 호밴이 설계했다. 이어 주변에 각종 정부 청사가 잇따라 들어섰다. 1800년 10월 정부문서보관소를 비롯해 정부기관과 공무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이주한다. 존 애덤스 대통령도 백악관에 최초로 입주하고, 의회도 새로 완공된 의사당 상원 건물에서 처음으로 회의를 개최한다.

영국군 공격으로 더욱 단단해지다

그러나 초기 워싱턴은 그야말로 황무지 안에 도시를 의도적으로 건설한 형태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반시설의 부족과 교통 불편 등이 뒤따라야 했다. 그 결과 여러 의원들과 시민들은 “끔찍하게 먼 거리에 있는 도시” “서부의 거대한 중앙시장” “끔찍한 오두막으로 채워진 수도” “황무지 그 자체인 도시” 등의 표현을 붙여주었다. 1808년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 임기를 마칠 무렵까지도 워싱턴의 인구는 5천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의회와 언론에서는 틈만 나면 수도가 너무 멀고 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곤 했다. 이런 소란 속에서 1814년에는 미영전쟁의 여파로 조지 콕번이 이끄는 일단의 영국군이 워싱턴에 진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소동 때문에 워싱턴은 한때 버려진다. 콕번은 미국의 의회와 백악관 그리고 해군병기창을 태워버리라고 명령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은 워싱턴이 자기들의 수도라는 사실을 훨씬 강렬하게 자각하게 된다. 그 결과 천도 논의는 모두 사라지고 워싱턴은 명실상부한 연방의 수도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영향으로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워싱턴은 끝까지 사수됐다. 남부의 버지니아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남군이 여러 방면에서 워싱턴을 공격하곤 했다. 북군의 사기를 꺾어버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북군은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한다는 결의로 맞서 이를 관철해냈다. 남북전쟁 뒤 워싱턴은 합중국의 확고한 수도로서 그 지위를 탄탄하게 구축하게 된다. 워싱턴은 살아남아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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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계획도시, 알렉산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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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국가의 대표적인 계획도시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아의 알렉산더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건설하기 시작한 이 도시는, 그 뒤 서기 642년 이슬람 세력에 함락될 때까지 거의 1천년 동안 번영을 구가했다.
처음 알렉산더대왕은 이집트를 지중해쪽으로 개방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파로스섬이 있는 나일강 하구를 주목했다. 그는 파로스섬을 바라보는 바위 지대에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파로스섬에만 도시를 건설하라고 충고했지만, 알렉산더의 야심은 훨씬 컸다. 그는 동에서 서로 거의 70km에 이르는 대도시를 세우고 거기에 제국의 수도를 두려 했다. 이런 의지에 따라 기초설계까지 직접 맡았다. 파로스섬과 이집트 본토를 잇는 거대한 도로 다리를 만들어 항구를 섬과 대륙 양쪽에 모두 두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도시를 완성하기 훨씬 전에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다.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그의 의지는 동방원정 당시 여러 점령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운 데서도 읽을 수 있다.
알렉산더의 죽음 뒤 마케도니아의 장관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권력을 잡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는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구상했던 개념에 따라 도시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한다. 도서관과 박물관, 체육관이 건설되고,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파로스의 등대도 건설된다. 서기 4세기에는 1561개의 목욕탕이 이용되고, 400개에 이르는 극장에서 그리스의 연극이 상연되기에 이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기간시설과 왕조의 학문 장려 정책에 따라 고대의 뛰어난 학자들이 대거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어 학문과 문명의 꽃을 활짝 피웠다는 점이다. 시와 문학, 연극 등이 발달하고 수학·철학·지리학·의학 등도 발전을 거듭한다. 기하학원론이 완성되고 지구의 원주율을 근사치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도 이곳이다. 기체학과 증기의 제어장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됐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와 이집트 문화를 로마에 전달해주는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상으로도 기독교 교리 논쟁의 중심 지역으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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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 오프 항해지도]</font>

▶ 중고생
- 〈미국사 100장면〉유종선/가람기획
〈이야기 미국사〉역사교육연구회/청솔
〈알렉산드리아〉창해ABC북/창해

▶▶ 대학생 이상
- www.britannica.com=moscow/whashington
〈고대문명의 여행-이집트〉
일경내셔널지오그래픽사(일본책)
〈50 Places of a Lifetime〉
미국내셔널지오그래픽/섬서사범대학출판사(중국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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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ING SOON]</font>

자료제공, 도움말씀 기다립니다.
okh1234@empal.com

▶ 다음호: 수도론 3

역사 속의 천도

▶▶ 다다음호: 다다음호: 수도론 4

현대의 천도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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