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인간의 존엄3 - 간디]
<font color="darkblue">비폭력을 무기로 폭력·식민주의·인종주의와 투쟁하며 인도의 독립을 쟁취한 ‘위대한 영혼’</font>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에피소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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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르 하드 나이. 아미아콘 고노 가스파르테 푸리나.”(나는 손이 없네. 그래서 나는 일을 할 수 없다네.)
1994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만난 한 사업가는 이 지역에 지금까지 이런 노래가 전해져온다고 일러주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중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손목을 잘렸다고 했다.
에피소드2
1893년 겨울, 인도 출신으로 24살의 젊은 변호사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더반에서 프리토리아로 가는 기차를 탔다. 1등칸의 표를 가지고 1등칸에 탔던 그는 역무원에게서 짐차칸으로 옮기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는다. 그가 거절하자 경찰까지 동원해 그를 강제로 기차에서 끌어내리고 짐까지 내던졌다. 유색인종이 1등칸에 탔다는 이유에서다. 이튿날 다시 역마차를 타고 여행을 계속하던 그는 이번에는 백인 마부로부터 심하게 얻어맞는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마부석 앞 바닥으로 물러나 앉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영국을 경악과 충격에 몰아넣다
고등학교 영어 참고서에 자주 등장하는 영어 문장이 하나 있다.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
영국인들은 그런 말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인도인에게 이처럼 치욕적인 표현은 없다. 흔히들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 영국은 셰익스피어가 상징하듯 지금껏 영어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국은 인도에서 빨아들이는 부와 쾌락을 끝까지 인도인에게 돌려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 영국의 탐욕스런 죄악은 기본적으로 민중들의 손목까지 무자비하게 잘라버리고, 인도인들을 학대·폭압하는 폭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제국은 폭력으로 건설되고 폭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제국주의 영국이 18~20세기에 다른 나라, 특히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폭력·무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1757년 벵골 지방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벵골 태수의 군대가 맞붙은 플라시 전쟁 때 영국군은 단지 3천명인데도 5만명의 벵골군을 물리치고 있다. 그 영국군 가운데 백인은 단지 3분의 1이었고, 나머지 3분의 2는 인도의 용병들이었다. 영국군의 무기가 압도적으로 우수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뿐인가? 벵골군에는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군까지 일부 가담해서 싸웠는데도 그랬다. 이 플라시 전쟁으로부터 1세기 이상 영국의 인도 지배가 공고화되고, 나아가 세계제국 영국의 군사력도 비약적으로 팽창한 상태에서 과연 인도는, 인도인은 어떻게 맞설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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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체절명의 국면에서 길을 연 사람이 바로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라는 뜻)로 불리게 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다. 그는 20세기 중반까지 완고하게 식민지배를 계속하려는 세계 최강의 무력국가 영국에 비폭력적 무저항운동(사티아그라하·원뜻은 ‘진리를 위하여’임)으로 맞섰다. 글도 모르는 인도의 대중은 간디의 지도에 따라 서로 팔을 걸고 대열을 지은 채 나아가 몽둥이로 얻어맞고 쓰러지는 역사상 유례없는 비폭력 시위에 참여했다. 인도의 대중은 그가 물레를 돌리면 같이 물레를 돌리는 것으로 영국 물품을 배척하는 운동에 떨쳐나섰고, 그가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소금을 만들었다. 간디의 한마디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에 영국 식민 당국은 경악과 충격 속에 빠지곤 했다. 불결하기 짝이 없고 다민족·다종교로 갈갈이 찢겨져 제대로 된 하나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것만 같던 인도인은 한 인간의 지도 아래 뭉쳐 그렇게 인간의 존엄을 증명했다. 그리고 역사를 바꿔나갔다.
간디는 1869년 인도 서해안 구자라트주 포르반다르에서 대대로 지방태수국의 총리를 지내온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평생 힌두교적 가치관과 종교관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된다. 간디는 19살 때인 1888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변호사 자격을 딴 뒤 귀국한다. 그는 1894년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인도인 상사의 고문 변호사 자리를 제안받자 곧바로 남아프리카로 간다. 이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시작으로 다른 인도인들의 참상에도 눈뜨게 된 간디는 남아프리카 거주 인도인의 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백인들의 기도를 계기로 정치적 활동에 나선다. 그 결과 ‘나탈 인도 국민회의’를 조직하게 된 그는 그 뒤 남아프리카에 20여년 머물며 인두세 폐지운동 등 인도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일한다. 남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기독교를 비롯해 세계의 여러 종교를 접하게 된 그는 힌두교의 주요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 깊은 영감을 얻는다.
또 톨스토이와 러스킨의 사상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그 결과 러스킨의 저작에서 영감을 받아 농사를 지으며 <인디언 오피니언>이라는 주간신문을 발행하는 센터인 피닉스공동체를 만드는가 하면, 톨스토이 농장도 세우게 된다. 그는 정치사상적으로 인도의 식민지 몰락이 영국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는 인도인들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과 종교분열도 간접적인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인도의 분열, 그리고 힌두교도의 총격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간디는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당시 영국 당국은 만일 인도인들이 이 전쟁에 협력해준다면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식으로 회유책을 내놓고 있었다. 간디 역시 이 약속을 믿고 앞장서서 인도인의 전쟁 참전과 영국 지원을 호소했다. 다른 한편으로 남아프리카에서 벌인 인권운동 투쟁이 기본적으로 한 구성체 안에서 영국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허용해달라고 주장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인 역시 백인과 동등한 의무를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과 결사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반동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영국의 이런 반동적인 억압정책에 반발해 인도인들의 반영민족운동이 일어나자 간디는 앞장서서 그 운동을 지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논지를 펴는 <영 인디아>를 창간하는 한편 영국제품 불매 운동, 물레 장려, 비폭력적 무저항주의 등 전 인도적 차원의 운동을 주도한다. 인도 민중들은 간디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인도 역사상 한 지도자의 정치적 이니셔티브에 대해 이처럼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는 일찍이 발현된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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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간디는 노령을 이유로 일단 정치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자와할랄 네루 등 젊은 지도자에게 자리를 맡긴 뒤 칩거한 채 묵상과 헌신 등으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간디는 다시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그는 독일 나치스 등 파시즘에 대해선 항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영국에 대해 지난 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맹목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은 반대했다. 영국이 당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모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식민 당국은 전시라는 이유와 반영적이라는 이유로 간디를 비롯해 국민회의 지도부를 모조리 붙잡아 투옥했다.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그는 아내를 잃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인도가 독립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간디 등 지도부가 투옥돼 있는 동안 인도의 힌두교 사회와 이슬람교 사회는 결정적인 분리독립쪽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결국 1947년 8월15일 인도는 평화적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하나의 인도가 아닌, 무슬림의 파키스탄과 힌두의 인도로 분리된 채였다. 그래도 간디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두 나라의 통합을 호소하며 인도 전역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도 대세를 되돌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48년 1월30일, 간디는 저녁 기도를 드리러 가던 중 과격 힌두교도의 총격을 받고 7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간디의 비폭력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가
간디는 살아서 적어도 세 가지 혁명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1) 식민주의에 대한 혁명
(2) 인종주의에 대한 혁명
(3) 폭력에 대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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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이 혁명은 20세기를 지나 21세기 현재까지도 엄밀한 의미에서 미완의 혁명이라는 성격을 띤다. 미국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북한에 대한 압박, 중국에 대한 견제의 이면에는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냄새가 강력하게 풍겨나온다. 미국뿐인가? 미국은 물론 유럽 축구판에서도 심심치 않게 분출되는 사건과 추문은 아직도 인종주의의 망령이 현대 세계를 배회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폭력의 문제는 식민주의나 인종주의보다 훨씬 명확하고 무거운 실체로서 인류를 짓누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간디는 이런 폭력에 대해 비폭력으로 맞서는 방식으로 폭력을 무력화하고 있다. 과연 이런 방식이 핵무기로 인류를 수백번이나 멸절할 수도 있는 이 참담하고 무시무시한 세계에서 유용할 수 있는가? 어쨌든 그는 20세기 영국과의 투쟁에서 성공했다. 간디의 이런 철학의 바탕에는 정확하게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나아가 간디가 힌두교를 신봉하면서도 기독교나 이슬람교, 파르시교, 자이나교, 불교, 가톨릭 등 여러 종교의 교리를 비교 연구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지켜나갔다는 사실도 종교갈등의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인류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또 그가 제시하는 무소유(아파리그라하)에 대한 철학도 새롭게 조명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도는 그 오랜 관념론의 역사와 그토록 다양한 종교 인종의 축적된 총량 속에서 간디라는 빛을 인류 앞에 선보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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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죽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font>
“죽은 사람들, 고아가 된 아이들,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그 미치광이의 파괴 행위가 전체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건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스런 이름으로 행해졌건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인생에는 단순히 속도를 더 빨리 하는 것 말고 그 이상의 것이 더 있다.”
“너 자신을 찾아내는 가장 좋은 길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며 너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의도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때 묻어 보인다.”
“나도 지금 우리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불복종 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군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신이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신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일 죽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배워라.”
“<신약>은 매우 다른 인상을 주었고, 특히 ‘산상수훈’은 사뭇 내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한 것을 대적하지 마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그에게 왼쪽 빰마저 내밀어라. 또 누가 네 겉옷을 취하거든 그에게 속옷까지 가져가게 하라’는 말은 나를 한없이 기쁘게 해 샤말 바트의 ‘한잔 물을 위해 잘 차린 한상 밥을 주라’는 말을 더 한층 깊이 이해하게 됐다.”
“나는 폭력을 반대한다. 폭력이 선한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보일 때라도 그 선은 일시적인 것이고, 그 폭력이 행한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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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오프 항해지도]</font>
중고생용 <골든 중앙판 위인전기-간디> 이화이/중앙출판사
<간디 자서전> 간디/한길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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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이상 <간디 평전> 제프리 애쉬/실천문학사
<인도사> 정병조/대한교과서주식회사
<경영자 간디> 요르크 치들라우/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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