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몽고의 길] 동서양의 운명을 역전시키다

등록 2004-11-26 00:00 수정 2020-05-03 04:23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역사를 바꾼 길 3]

실크로드 한계 뛰어넘은 몽고의 길… 화약·나침판 등 전파로 중세 유럽에 강력한 영향

▣ ▣ 오귀환/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광고

“대칸의 사자가 칸발릭(북경)을 출발하면 어느 길을 택하든지 40km마다 ‘쟘’이라고 부르는 역을 만난다. ‘쟘’은 역사(驛舍)라는 뜻이다. …어떤 역사에는 말 400마리가 사절용으로 언제나 준비돼 있다. …길도 제대로 없고 민가도 여관도 없는 외딴 시골을 지나는 경우에도 어디서나 역사가 세워져 있다. 단지 그 간격이 좀 길어져서 하루의 이동거리가 40~50km 아닌 56~72km가량일 뿐이다. …정말 이 제도만큼 대규모의 것은 일찍이 볼 수 없었다. …이런 역참들에는 사절을 위해 모두 30만 마리 이상의 말이 상비돼 있다.”

‘릴레이 연결형’에서 ‘풀코스 완주형’으로

광고

13세기 말엽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는 25년에 걸친 길고 긴 동방여행을 마치고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했다. 아시아 동쪽 끝에서 동유럽까지, 역사상 가장 큰 땅을 지배한 몽고인들은 오늘날 21세기 사람들조차 경탄시킬 만한 놀라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고 폴로의 은 밝히고 있다. 이 시스템은 단지 사람을 이동시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3대 구대륙에서 당시 생산되고 유통되던 다양한 물질적·정신적 자원을 활발하게 이동시키고 교류시켰다. 몽고제국은 철도망과 체신망을 결합한 것과 비슷한 이 놀라운 역체(驛遞) 시스템으로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문명교류를 성공시켰다. 역체 시스템은 바로 몽고제국의 대동맥이었다.

몽고제국 이전 시기에 인류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을 연결해왔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몇 가지 점에서 제약을 받고 있었다. 첫째, 중국의 장안에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나 시리아 지역에 이르는 방식이 ‘풀코스 완주형’이 아니라 ‘릴레이 연결형’이었다. 한 특정 대상이 실크로드의 처음부터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한 팀은 일정 구간만을 가고, 다시 다른 팀이 다음 구간을 떠맡아 이동하는 식이었다. 둘째, 동서양 사이에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등장해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실크로드가 연결되거나 끊기는 등 불안정하게 운용됐다. 아랍과 페르시아가 사실상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잡고 간섭하거나 방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몽고제국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칭기즈칸의 서방원정을 시작으로 몽고제국은 팽창에 팽창을 거듭해 마침내 4대 칸국까지 건설하기에 이른다. 몽고인이 지배하는 제국은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을 망라하는 규모로 확대된다. 몽고제국의 깃발 아래 유교문명, 불교문명, 힌두문명, 이슬람문명, 페르시아문명, 기독교문명, 슬라브문명 등 거의 모든 동서양 문명이 공존한 채 활발하게 교류하게 된다. 특히 오고타이 칸국(알타이산맥 일대), 차가타이 칸국(중가리아분지와 타림분지 그리고 아무다리야강 동쪽 지역), 킵차크 칸국(동유럽 지역), 일 칸국(페르시아와 터키 지역)의 4대 칸국이 각각 서로 다른 문명권에 기반해 건설됐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지리라는 신호와도 같았다. 몽고족 형제국가끼리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교류를 강화하면 할수록 각 문명간 교류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닌가?

그 결과 몽고제국의 판도 아래 획기적인 동서양 교류가 가능하게 된다. 몽고제국의 길은 실크로드의 한계를 이렇게 극복한다.

광고

(1) 동서양 교통로의 비약적 확장: 과거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또는 로마까지 연결됐다. 이제 몽고 시대에 이르러 그 영역은 동쪽으로는 북경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남쪽의 국제 항구도시 항주에까지 연장되고, 서쪽으로는 로마를 넘어 중부 유럽까지 넓어진다. 인류의 지평이 사실상 그만큼 확장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 안전의 증대: 더 중요한 것은 동서양 교류가 훨씬 안전하게 됐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도로망 전체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단일한 제국이 없었다. 그 때문에 구간구간마다 과도한 관세를 붙이는 제국이나 영지가 많은가 하면, 도적의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하지 못했다. 이슬람권의 과도한 간섭과 방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몽고제국 아래 동서양은 안전한 교류를 할 수 있게 됐다.

지폐 통용, 유럽보다 400년이나 앞서

(3) 풀코스 완주형의 작동: 이제 동서양을 완주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게 등장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아랍 문명권의 대표적 여행가 이븐 바투타를 비롯해 교황의 특사였던 카르피니 신부, 프랑스 국왕의 종교사절이었던 기욤 드 뤼브록 등의 동양여행이 가능해진 것도 모두 이 시기 들어서다.

(4) 동서양 상시 교통 시스템: 몽고의 역체 시스템은 동서양의 상시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비록 정기편은 아니었지만, 역참마다 갖춰진 상비시설과 안정적인 운영인원 그리고 말 등에 힘입어 상시적인 이동이 가능하게 된 셈이다.

(5) 바닷길의 병행 발전: 몽고제국 아래 동서양을 잇는 바닷길도 함께 발전한다. 육로의 발전에 따라 지리상의 지식이 팽창한 결과다. 몽고제국은 송나라 때 이룩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해양운영 경험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결과 중국권에선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이라는 관념을 제시한 것도 이 몽고제국 시기다. 무엇보다 유라시아 전역에 퍼진 4대 칸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기 위해서도 바닷길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요구됐다.

(6) 동서양 단일시장의 맹아 탄생: 이런 변화의 최종적인 귀결은 사실상 동서양 단일시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몽고제국은 한인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수구화되곤 했던 종래의 중국 왕조와 달리 인적·물적 교류에 대단히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기에 대외교역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7) 단일화폐의 통용 시작: 제국의 팽창과 교통의 발달은 단일화폐의 필요성을 높이게 된다. 그 결과 교초(지원통행보초)라는 지폐와 차가타이 화폐가 제국에서 널리 통용되기에 이른다. 그 이전 남송 시대인 1170년 지폐가 처음 등장하기는 했어도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광범위한 규모로 통용된 것은 몽고제국 때부터다. 유럽보다 400년이나 앞서 지폐를 통용시킨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동서양 교통로의 획기적 발전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하다.

몽고제국의 뛰어난 역체 시스템은 초기 몽고 지배자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장 인덕이 많았다고 평가받는 오고타이 칸에서 비롯됐다. 오코타이라면 야율초재의 진언을 받아들여 중국 개봉의 학살을 피한 칸이기도 하다. 는 오고타이 칸의 말이라며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그동안 사신이 왕래할 때에 백성들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그 결과 왕래하는 사신도 여행이 늦어지고 백성도 고통스럽기 일쑤였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결단하기로 한다. 여러 고장의 천호(千戶·행정-군사적 단위 집단)에서 참호(站戶·역참일을 보는 집)와 마부를 공출해 역참일을 보게 한다. 사신들은 아주 중요한 때를 빼고는 이 역참을 이용해서 오가도록 한다.”

‘급체포’라는 익스프레스 서비스

이런 역참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졌다. 일반적인 종류의 역참으로는 육로를 이용하는 육참과 선박을 이용하는 수참이 있었다. 육참의 교통수단으로는 가장 널리 이용된 것이 말이지만, 낙타나 소·당나귀·양 등도 이용했다. 개를 이용하기도 했다. 몽고제국 전역에서 이런 역참이 얼마나 많이 운용됐는지는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 서쪽 끝인 금숙성 주천에서 대도인 북경까지 모두 99개 있었으며, 중국 경내에만 140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역참과 별도로 익스프레스 서비스도 운용되고 있었다. 급체포(急遞鋪·몽고말로 찌데뾰)라는 것으로서 조정과 지방행정기관 사이에 긴급문서를 운송하는 특수역참이었다. 일종의 행정행낭 제도라 할 수 있는데, 송나라 때의 비슷한 제도인 급각체(急脚遞)를 본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급체포는 10리나 15리, 20리마다 설치하고, 급체포 10개마다 우체국장이라 할 수 있는 우장(郵長) 1명과 포졸(鋪卒) 5명을 배치했다. 급체포를 이용할 경우 하루 밤낮에 400리를 주파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익스프레스 서비스를 이용하면 일반 역참의 경우 6일 이상 걸리는 거리를 3, 4일 만에 주파했다. 나아가 마르코 폴로를 뒤이어 원나라에 왔던 이탈리아 프란체스코파 선교사 오도리코 다 포르데노네는 저서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급체포를 통해 황제는 30일 여정 거리에서 일어난 사태를 하룻만에 보고받았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지방에서의 반란 발생 등 긴급사태 때에는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릴레이처럼 운용됐다. 첫 포졸이 역참에서 가장 힘세고 괄괄하고, 안장이 붙어 있는 말 가운데 한 마리를 골라타고 전속력으로 달린다. 다음 역사에선 이 포졸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방울이 울리는 소리를 멀리서부터 듣고 역시 최상의 컨디션에 있는 포졸과 말을 준비했다가 이어받아 달린다. 밤에는 횃불을 든 길잡이까지 앞세워 달려 하룻밤 또는 하룻낮에 240km에서 320km를 단숨에 달린다.

유럽 봉건영주들을 함락시키다

이 역체제도의 안전하고 합리적인 이용을 위해 ‘패’라고 하는 패스포트가 등장했다. 일종의 신분증이자 역참 이용 허가증이라고 할 수 있는 패는 크게 △ 금자원형패부 △ 은자패부 △ 해청부 △ 원패의 4가지가 있었다. 해청부는 금패·은패·철패의 3가지로 다시 나뉘었고, 원패는 금자와 은자로 구분됐다.

몽고의 길은 서양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몽고의 길을 통해 이전까지 아랍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수받았던 제지술·인쇄술·나침판·화약 등 중국 4대 발명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특히 화약의 대대적인 유럽 전파는 종래까지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중세 봉건영주들의 성을 격파해 유럽 지역에 통일국가들을 출현하게 한다. 나아가 나침판의 전래가 유럽 국가들의 항해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서구인에 의한 지리상의 발견 등을 이끌게 됐음도 빼놓을 수 없다. 몽고의 길은 어느 의미에서 동서양의 운명을 역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와 선교사들



몽고의 길은 서구인에게 중국의 존재와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로마인들은 중국을 비단이 나는 지역으로 알았다. 그래서 비단, ‘세리카’가 나는 나라라고 해서 ‘세르’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인들은 동쪽에 있는 큰 나라의 하나를 ‘티나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티나이’라는 이름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 세르와 티나이를 서로 다른 나라로 알고 있었고, 이런 흐름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거의 1천여년 동안 이어진다.

13세기 말엽 마르코 폴로가 그런 중국을 향해 본격적인 여정에 나선다. 폴로는 페르시아어와 몽고어, 터키어, 아랍어에 능통한데다 총명하기까지 해 몽고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는다. 그래서 17년 동안 쿠빌라이의 신하로 봉직하기도 한다. 그는 양주의 총독을 지낸 적도 있고, 캄보디아·티베트·인도에 파견되기도 했다. 은 마르코 폴로의 25년 여정의 결실로, 그의 구술을 받아 루스티첼로 드 피세가 기록한 것이다. 이 기술을 통해 폴로는 유럽인의 동양관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조차 중국을 화북과 화남으로 기술하는 등 세르와 티나이를 구분하는 로마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한계를 한발 더 극복시키고 발전한 것이 마르코 폴로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국왕의 사절로 몽고제국을 방문한 프란체스코파 신부 기욤 드 뤼브록이다. 그는 에서 중국의 실체를 좀더 분명하게 밝힌다. 최초로 ‘카타이’(티나이)와 세르가 같은 나라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거친 여러 민족들의 정보를 자세히 기록한다. 그의 저술 이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중국행이 계속 이어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럽인의 동양에 대한 인식은 점차 정확해진다. 동시에 비단 등 온갖 진귀한 물품의 산지로서 중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결국 동양에 대한 이런 관심과 이해관계가 지리상의 발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온 + 오프 항해지도]


▶ 중고생
- 시공사
진순신/한국경제신문사

▶▶ 대학생 이상
- 정수일/창작과 비평사
장 폴 루/창원사(일본책·사진)
시바 료타로/고려원
김종래/삼성경제연구소





[COMING SOON]

자료제공, 도움말씀 기다립니다.
okh1234@empal.com

▶ 다음호: 역사를 바꾼 길4 - 바다의 실크로드

▶▶ 다다음호: 수도론1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