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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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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해자에게 질문하자

‘나’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으로 그리고 피해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가해자에게 함께 묻는 #ask 운동을 제안한다
등록 2018-02-06 14:20 수정 2020-05-03 04:28
지난 1월7일 열린 제75회 골든글로브는 #미투 캠페인의 절정이었다. 왼쪽부터 오프라 윈프리, 니콜 키드먼, 살마 하이에크, 리즈 위더스푼, 애슐리 저드. 연합뉴스/ 연합뉴스/ 연합뉴스/ 연합뉴스/ 연합뉴스

지난 1월7일 열린 제75회 골든글로브는 #미투 캠페인의 절정이었다. 왼쪽부터 오프라 윈프리, 니콜 키드먼, 살마 하이에크, 리즈 위더스푼, 애슐리 저드. 연합뉴스/ 연합뉴스/ 연합뉴스/ 연합뉴스/ 연합뉴스

최근 미국 할리우드의 미투(Me Too) 운동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용기에서 시작된 운동은 직장 내 성폭력을 예방하고 지원하는 단체 ‘타임스업’(Time’s up, www.timesupnow.com)의 설립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전세계적인 뜨거운 연대와 지지의 시간이 이어졌다. 한국 언론은 ‘한국에선 왜 미투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물어왔으나, 1월29일 서지현 검사의 고백으로 한국의 미투 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성폭력 피해의 심각성과 피해자의 경험이 사회적 이슈가 된다는 것은 무척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동안 성폭력 피해자들은 정말 말하지 않았던 것인가?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폭로, 피해자의 가장 절박한 수단

미투 운동은 2006년 여성인권 운동가 타라나 버크에 의해 시작됐다. 버크는 ‘미투’에 “여성을 도울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2017년 10월19일치 기사에 따르면 그는 여성과 소녀, 특히 유색인종 여성과 소녀를 돕기 위해 ‘마이스페이스’(MySpace)라는 페이지를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실 할리우드에서는 2005년 유명 코미디언 빌 코스비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여성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에마 왓슨으로 대표되는 ‘HeForShe’ 캠페인 등이 있었다. 또 #WhatWereYouWearing (너는 무엇을 입고 있니) #YouOkSis(자매여, 당신에겐 문제가 없다) #SurvivorPrivilege(살아남은 자들의 특권) 등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는 성폭력에 대한 편견, 길거리 괴롭힘, 성폭력 2차 피해 등에 맞서는 해시태그 운동이 지속됐다. 이 상황에서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문제제기 하면서 10년 전 버크가 사용했던 미투에 영감을 받아 미투 운동(#Me Too)이 시작됐다.

이는 미투 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10여 년 전, 혹은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피해를 알렸던 당사자와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녀’들의 목소리를 알리려던 수많은 운동의 사회적 공론화의 흐름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를 바꾸는 힘은 갑작스럽고 우연한 힘에서만이 아니라 그 갑작스럽고 우연한 힘이 모이는 신뢰·지지·연대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2017년은 어떠했는가?

한국의 2017년은 연초 유명 연예인 박○○에 의한 성폭력 무고 사건에서 시작됐다. 여성 4명이 성폭력 피해를 법에 호소했지만, 오히려 무고나 명예훼손의 피의자·피고인이 됐다. 한 피해자는 실형을 받아 감옥에 있다. 또 탁현민 청와대 선임행정관이 10대 여중생을 대상화·타자화한 과거의 저서에 대해 “내가 그 여중생입니다”라는 비판과 비판의 목소리를 공유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그 기사를 보도한 신문사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당한 여러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 역시 가해자의 위협과 협박으로 무고나 명예훼손 등 각종 역고소에 시달리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가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폭로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 차이가 클 때, 피해자가 약자일 때, 피해자가 선택하는 가장 절박한 수단이다. 이는 피해자가 ‘폭로’라는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피해를 사회 시스템에서 제기할 수 있는 문화적·제도적·인식적 기반이 전혀 없음을 드러낸다. 더 이상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멈추려 했던 피해자들의 의지는, 남성 중심적인 법 해석과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문화로 인해 무력화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성폭력 피해자 되기의 어려움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자 되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평소 행실’에 대한 비난은 물론, 당일 함께 술을 먹었는지, 옷차림이 어떠했는지, 성 이력이 어떠한지 등의 질문을 이겨내며 성폭력에 대해 사회가 지닌 통념과 맞서야 한다. 또 자신의 피해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피해를 명료하게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하고 오랜 투쟁을 견딜 수 있는 시간·돈·체력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힘들게 들어간 학교와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 일도 있다. 성폭력 피해자로 호명되는 과정에서 부가적 피해에 가까운 불편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 ‘침묵’은 또 다른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화할 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녀들의 침묵을 비난할 수 없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상호 소통 과정이다. 들을 준비가 안 된 사회가,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 검사가 스스로 은폐한 것”이라는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발언은 피해의 회복과 복구까지도 오로지 피해자 몫으로 반사해버리는 전형적인 피해자 책임론일 뿐이다.

미투 운동을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하기, 폭로, 스피크아웃(Speak Out) 운동이라 한다면, 한국 여성인권 운동의 발전은 수많은 피해자의 스피크아웃으로 이뤄져왔다. 대표적으로 1986년 경기도 부천서 성고문,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당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1993년 서울대 교수 성희롱, 2000년대 초반 한국 시민단체에서 벌어진 여러 성폭력, 2009년 고 장자연씨 성접대 등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성폭력 관련 법이 제·개정됐다.

2015년 이후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데이트폭력’ 폭로나 해시태그(#)를 단 새로운 폭로 방식이 등장했다. 문학계, 영화계, 연예계, 게임계, 음악계, 스포츠계, 종교계 등에서 시작된 수많은 해시태그 운동으로 피해자들의 말하기가 이어졌다. 최근에도 영화감독이나 남자배우, 유명 연예인, 대기업 상사에 의한 성폭력이 계속 폭로됨으로써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찍는 페미, 페미라이터, 믿는 페미, 전국디바협회, 소라넷 폐지 운동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출판계, 문학계, 영화계에서 자체적인 사건 처리 매뉴얼을 만들거나 작가 서약서를 받는 곳도 생겨났다.

‘꽃뱀 판독기’가 될 것인가

다큐멘터리나 자서전을 통해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후 회복 과정을 이야기하는 일도 활발하다. 친부 성폭력의 피해 생존자의 수기 나, 피해 생존자들의 집단적 치유 과정을 그린 등의 다큐멘터리가 대표적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 피해자의 말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사회적 인식에 저항하면서 2003년부터 성폭력 피해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잘 말하는 법’이 아니라 ‘잘 듣는 법’을 배우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하기’는 잘 ‘듣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가 주변의 수많은 미투 운동을 지나쳐온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 잘 ‘듣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일이다.

모든 공동체가 ‘젠더 감수성’을 갖춰야 하지만, 성폭력을 ‘판단’하고 기소할 권한을 가진 검사의 성평등 의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7년 성폭력 수사 재판 과정에서의 디딤돌·걸림돌 시상에서 총 10개의 걸림돌 중 6개가 검찰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검찰이 성폭력과 성폭력 피해자에게 어떤 관점을 갖고 수사와 재판을 해왔는지 여성운동단체들의 평가를 반영한 것이다. 2003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법조인의 성별의식과 양성평등교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당시 법조인들은 ‘다른 범죄와 비교해 성폭행 사건의 경우 가해자에게 합의금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허위 고소를 하는 경우가 많다’의 항목에 80% 이상이 ‘성폭행은 허위 고소가 많다’고 응답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법조인들의 인식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회의적이다. 검찰은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수사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검찰 내 성평등 감수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질적인 성평등 교육을 하고 내부 성폭력 실태를 파악하는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 이는 검찰 내 성폭력 예방뿐 아니라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에 대한 왜곡 없는 판단과 처벌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Me Too, speak out 운동의 물꼬는 터졌다. 상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온 많은 피해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그 물결에 방관자로 서서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를 분별하는 ‘꽃뱀 판독기’가 될 것인가, 지지와 조력을 실천하는 연대자가 될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지지와 연대를 원한다면 내 직장과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술자리 농담 등 여러 문제에 대해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너도 잘한 것 없네’라는 냉소적 태도보다, ‘말해줘서 고맙다’ ‘네 잘못이 아니다’ ‘괜찮아도 괜찮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던지는 온갖 짜증스러운 질문을 가해자에게도 함께 묻자.

피해 말하지 못하는 여성들

‘나’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으로, 그리고 피해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가해자에게 함께 묻는 #ask 운동을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말하기 운동의 핵심은 대상화된 ‘시혜’나 ‘보호’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감이다. 이는 사회의 시선을 정상화하는 급진적 인식의 전환이 이뤄져야 함을 뜻한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유해야 하는 책임임을 각성해야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역공(backlash)이 거세지는 이때, 우리는 제2, 제3의 서지현 검사와 아직도 자신의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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