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상전이고, 나의 상전은 차르이다. 나의 영지에서는 내가 차르이니 나는 지상에서 너의 신이다. 하느님은 천둥과 벼락으로 공기를 밝게 하신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 마을에서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고 천둥과 불벼락을 내려 깨끗이 할 것이다.”
프러시아의 민속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학스트하우젠이 1847년 쓴 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러시아의 한 영주가 농노에게 했다는 이 말은, 농노는 영주를 뽑은 적 없으나 이들에게 행사하는 영주의 권력은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짐작게 한다.
지자체장은 영주, 시민은 농노?
이 대목을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장·지방의원과 유권자의 관계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투표율은 50%에 불과하고, 구청장·구의원 이름도 잘 모르는 유권자가 부지기수다. 말하자면 구청장·구의원을 뽑은 적 없는 이가 다수다. 하지만 기초단체의 한 해 평균 예산은 3천억원에 이르며, 단체장과 지방의원의 권한은 막강하다. 특히 자치단체장은 지방자치법에 따라 예산 편성·집행권, 각종 사업의 인허가권, 자치단체 소속 공무원·산하기관장의 인사권 등을 쥐고 있어 ‘동네의 대통령’이라고 할 만한 ‘절대 권력’을 행사한다. 가히 영주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우리나라는 봉건제 사회가 아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가 말한 것처럼 “권력의 자리는 애초 비어 있으며, 단지 선출된 대표들이 한시적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 민주주의 사회다. 그런데도 선출된 대표들이 영주처럼 구는 건 ‘묻지마 투표’와 무관심 탓이 크다. 비어 있던 권력의 자리에 가면 어떤 정책을 펼칠지, 예산을 어디에 쓸지, 이견이 충돌할 때 어떻게 갈등을 조정할지 투표 과정에서 검증받지 않고 당선 뒤에도 감시받지 않는 탓이다. 투표해야 한다. 그리고 따져야 한다. 그래야 풀뿌리 정치의 ‘잡초’ 같은 낡은 관행과 정치인이 퇴출되고, 그래야 동네가 바뀐다.
은 지방자치 혁신과 유권자 참여운동을 위해 참여연대 등 전국 353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유권자희망연대’와 풀뿌리 정치운동 단체인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의 도움을 얻어, 살기 좋은 우리 동네를 꿈꾸는 유권자들이 6·2 지방선거에서 따져봐야 할 공약을 5가지 분야로 나눠 살펴봤다.
기사에 소개된 것을 넘어 좀더 따지고 싶다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www.nec.go.kr)에 들어가보면 된다. 후보등록이 시작되는 5월13일부터 지방자치단체장·지방의원·교육감·교육의원 후보와 각 정당의 공약·정책을 제공한다. 또 5월24일께 선관위가 집집마다 발송할 선거공보엔 후보자의 공약뿐만 아니라 실행계획도 실려 있다. 공약 이행에 드는 재원 마련책과 추진 일정 등이 불분명하다면 허울만 그럴듯한 ‘짝퉁 공약’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보육·교육 분야 등은 모든 사람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한 발짝 걸친다’는 식으로 생색만 낸 공약이 적지 않다. 이지현 유권자희망연대 정책팀장은 “이번 선거에선 뽑아야 하는 사람이 8명이나 되기 때문에 챙겨봐야 할 공보물의 분량도 적지 않다. 하지만 누가 내 삶의 질을 높이고 지방자치를 혁신할 수 있는 사람인지 가려내려면 이것부터 꼼꼼히 챙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권자단체 누리집 활용을
조금 더 품을 들일 용의가 있다면 유권자희망연대(www.2010vote.net),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2010net.tistory.com), 좋은정치 실현을 위한 고양 무지개연대(cafe.daum.net/goyangnet), 부산을 바꾸는 시민네트워크(cafe.daum.net/LetsChangeBusan), 광주 희망과 대안(blog.daum.net/2010gjhope), 충북 유권자희망연대(cafe.daum.net/ngocb) 등 각 지역의 유권자 단체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된다. 이들은 제각각 좋은 공약과 좋은 후보를 선정해 알리고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왜 그런 정책과 후보를 선택했는지 살펴보면 선택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제각각 특징이 있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부각된 현안도 다르기 때문에 지역 사정을 반영한 공약을 검증하고 싶다면 이런 사이트가 특히 유용하다.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똑똑한 유권자는 어떤 정치인이라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다. 유권자의 똑똑함을 보여줄 날은 바로 6월2일이다.
경기 구리시에 사는 김지은(33·가명)씨는 주말마다 경북 성주에 간다. 성주에 사는 부모님께 딸 윤지(2·가명)를 맡겨뒀기 때문이다. 맞벌이 부부라 처음엔 윤지를 어린이집에 보낼까 생각했지만, 한 달에 38만원씩 내는 국공립 어린이집은 대기 인원이 많아 1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사립은 한 달에 50만원 정도 비용이 드는데, 오후 4시면 끝났다. 김씨가 퇴근할 때까지 서너 시간 동안 윤지를 돌볼 육아 도우미는 한 달에 60만원은 줘야 했다. 결국 부모님께 기댈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질 높은 보육 교육을 받고 검증된 교사들이 아이를 늦게까지 돌봐주는 국공립 어린이집이 늘어나면 이렇게 부모님 고생 안 시켜도 되고 주말마다 성주까지 왔다갔다 하느라 동동거리지 않아도 될 텐데…”라고 아쉬워한다.
최희수(32·가명)씨는 경기 수원시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들 나지훈(8·가명)군을 혼자 키우는 ‘싱글맘’이다. 대전에 사는 전남편과 5년 전 헤어져 수원으로 왔다. 지훈이가 유치원을 졸업할 때까진 대전에 아이를 맡겼기 때문에 영어학원의 회화 강사로 매일 오후 1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지훈이를 데려와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뒤부터 얘기가 달라졌다. 낮 12시40분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지훈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지훈이가 태권도와 피아노 학원에 다녀와도 오후 3시30분밖에 안 됐다.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직장이 없는 전남편이 수원으로 와서 최씨가 퇴근할 때까지 지훈이를 보살펴야 했다. 그러다 최씨는 초·중·고교 영어회화 전문강사 제도가 올해부터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됐고, 운 좋게 집 근처의 한 초등학교에 채용됐다. 월급은 학원 강사 때보다 반으로 줄었지만, 오후 4시40분이면 퇴근할 수 있어 저녁에 지훈이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아도 된다. 물론 전남편은 대전으로 돌아갔다.
‘24시간 돌봄 서비스 지원’ 등 눈에 띄네“집에서 가까운 어린이도서관은 버스 타고 10분 정도 걸리는데, 지훈이 혼자 가기는 멀죠. 학교나 학원을 오가는 길에 들러 책도 읽고 놀이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꼭 클 필요 있나요? 아이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고, 안심하고 머무는 게 중요하죠.” 최씨는 6월2일 지방선거에서 보육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당선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바람처럼 아이와 부모가 모두 행복한 동네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특히 국내 전체 어린이집(3만3499개)의 5.5%에 불과한 국공립 어린이집(1826개)을 늘리겠다는 건 대부분의 정당과 후보자들이 내세우는 공약이다. 그런데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한나라당은 저소득층 밀집지역에 국공립 시설 160곳을 더 만들겠다고 밝혔다. 다른 정당과 시민사회는 이 수가 너무 적어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반면 민주당은 이를 지금의 3배(3600개 추가 설치)로 늘리기로, 민주노동당은 1개 동에 1개씩(2천여 개 추가) 설치키로, 진보신당은 읍·면·동마다 3개씩(9945개 추가) 설치키로 공약했다. 국공립 어린이집을 11~35%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또 지역운동가 출신의 무소속 후보 20여 명은 기존의 민간 어린이집을 국공립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새로 짓는 데 드는 비용을 국공립 전환에 들여 보육의 질을 높이고 부모의 부담을 덜겠다는 계획이다.
갑자기 열이 나거나 감기에 걸려 어린이집·유치원에 갈 수 없는 아이를 직장인 부모 대신 돌봐주는 어린이 간호보육센터 설립, 출퇴근이 불규칙한 부모도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도록 하는 보육시설 24시간 돌봄 서비스 지원, 육아 부담을 덜어주는 육아수당 지원 등의 공약도 눈에 띈다.
동네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 도서관 만들기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쉬고 노는 공간인 동시에 주부·노인 등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공약이다. 하승수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 운영위원은 “정부에선 인구 6만 명에 1개씩, 장서가 2만~3만 권에 이르는 중규모 공공도서관을 짓겠다고 공언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며 “규모가 아니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동네마다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hr>대한민국처럼 교육에 유난스런 나라가 또 있을까. 통계청이 낸 를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가 쓴 교육비는 월평균 소비지출(215만6천원)의 13.5%(29만1천원)로, 소비지출 항목 가운데 2위였다. 1위는 13.8%(29만8천원)를 차지한 식료품·비주류음료였다. 쉽게 말해 먹는 데 쓰는 만큼 교육에 썼다는 얘기다. 이를 한국은행의 국민소득 통계로 바꿔 설명하면, 지난해 교육비 지출액은 모두 41조2116억원으로, 우리나라 한 해 예산(300조원)의 15% 가까운 규모가 된다.
유난스러움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2006)를 보면, 국내총생산(GDP)의 7.2%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의 교육비 지출은 회원국 평균인 5.8%를 뛰어넘는다. 그런데 이 지출 가운데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4.3%로, OECD 평균(5.0%)보다 낮은 반면, 민간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회원국 평균(0.8%)의 3배가 넘는 2.9%다. 정부가 공교육에 쓰는 돈은 다른 나라보다 적은 반면, 개인이 학교에 다니거나 사교육을 받으려고 쓰는 돈은 훨씬 많다는 뜻이다.
교복·급식·교재비도 만만찮아에 나온 또 다른 통계를 보자. 교육비가 부담스럽다고 밝힌 가구주는 2004년 77.2%에서 2008년 79.8%로 조금 늘었다. 그런데 저학력층이 느끼는 부담은 평균보다 훨씬 늘었다. 교육비를 부담스러워하는 가구주의 학력별 분포를 보면, 4년 전에 비해 초졸 이하는 9.6%포인트 늘어난 82.5%, 중졸 이하는 7.7%포인트 늘어난 87.7%로 조사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저학력층에 저소득층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육비 부담은 형편이 어려운 집일수록 더 커진다고 풀이할 수 있다.
교육비 가운데 사교육비 부담이 가장 크긴 하지만, 교복비·급식비·교재비·등록금 등 학교를 다니려면 꼭 내야 하는 돈도 만만찮다. 6월 지방선거 출마자와 각 정당은 이런 부담을 덜 공약을 저마다 내놓고 있다. 적어도 학교만이라도 마음 놓고 보낼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친환경 무상급식이다.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은 공식적으로 저소득층에게만 급식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은 전면적인 친환경 무상급식 실시를 주장한다. “부유층 자녀에게까지 무상급식을 하는 것보다 저소득층 자녀 지원이 더 시급하다”는 게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의 논리지만, 국가가 강제한 의무교육을 받기 위해 드는 비용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며 전면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쪽의 논리가 좀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일부 후보는 교복 무상지급 또는 공동구매 지원, 학습준비물 전면 지원, 사교육을 대체할 방과후 학교 확대, 등록금 대출이자 지원 등의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일본 민주당이 생활정치의 돌풍을 일으킨 건 고교 무상교육처럼 교육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 수 있는 정책 덕분이었다”며 “한국은 자원 없는 나라라면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사람에겐 인색해 모두가 교육비로 힘들어한다. 이번 지방선거는 반드시 교육 투자를 혁명적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hr> 질기고도 튼튼한 일자리를눈여겨볼 정책 ③ 지역경제…지자체부터 청년 고용,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사회적 일자리 마련 나서야
경제는 어느 선거에서나 주요 의제였다. ‘CEO 대통령’까지 탄생시킨 경제 살리기에 대한 기대는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발견된다. 시민사회와 종교계 인사들이 시민의 정치 참여를 목표로 만든 시민단체 ‘희망과 대안’이 지난 1월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40.9%가 6월 지방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로 ‘서민 중심 경제정책’을 꼽았다. 경기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먹고살기가 팍팍한 서민으로선 절박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6개월 인턴이 일자리 대책?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임기웅(31)씨 심정도 그렇다. 2005년 인천의 한 전문대를 졸업한 뒤 학습지 보조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엄연히 매일 출근해 회사 지시를 받고 일을 했지만, 법적으로 학습지 보조교사는 ‘특수고용직’이어서 기본급도 없고 4대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동동거려도 시원찮은 수입과 불안정한 신분을 견디다 못해 6개월 만에 일을 관뒀다. 그다음 취직한 곳은 한 전자제품 공장이었다. 회로기판을 수리했는데, 밤늦게까지 잔업을 해도 월급은 100만원이 안 되는 비정규직이었다. 그나마도 1년이 채 못 돼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이후 임씨는 ‘회사’를 다닌 적이 없다. 공연 음향·조명 오퍼레이터, 말농장 허드렛일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 달에 50만원을 손에 쥔다. 15만원은 ‘기숙촌’이라고 부르는 고시원보다 조금 넓은 단칸방의 월세로, 5만원은 교통비로, 3만원은 통신비로 쓴다. 나머지는 식비나 옷값으로 쓴다. 버는 대로 쓰는 생활에 익숙해진 탓에 다행히 빚은 없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한 번만이라도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길어야 6개월이면 끝나는 프로그램을 청년 일자리 대책이라고 내놓는 건 생색내기죠. 정말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좋겠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선 임씨의 바람처럼 안정적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가려볼 만하다. 현재 청년고용촉진특별법은 공공기관과 지방공기업이 매년 정원의 3% 이상 청년 미취업자를 고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강제 조항이 아니어서 실제 효과는 미미하다. 일부 후보들은 이 청년고용 할당을 의무화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 자치단체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 민간 부문의 참여도 이끌어내기 쉽다.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에 고용된 비정규직의 절반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도 일자리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일자리지원센터를 설립해 간병인, 보육·가사 도우미 같은 사회적 일자리를 발굴하고 구직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준다거나, 농가와 학교를 연결해 식재료를 공급하는 학교급식지원센터를 사회적 기업화하는 일은 여성과 은퇴자에게도 일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다.
한편 재래시장과 동네 슈퍼마켓 영세상인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고 비판받는 대형마트와 기업형 수퍼마켓(SSM) 규제도 서민경제에 숨통을 트이게 할 공약으로 꼽힌다. 구체적 공약으로는 대형마트·SSM의 허가제 전환 및 영업시간 제한, 재래시장과 겹치는 판매 품목 제한, 해당 지역 생산품 판매 의무화, 수익금의 일정액 지역 환원 등이 있다.
<hr>소수자를 향한 ‘편파적’ 사랑눈여겨볼 정책 ④ 인권과 평등…성인지 관점의 제도들, 파파쿼터제·육아휴직 급여 인상·여성공무원 확대 등
유엔개발계획(UNDP) 조사 대상 109개국 가운데 여성권한척도(GEM) 61위, 세계경제포럼(WEF) 조사 대상 134개국 가운데 성 격차 지수 115위. 국제기구들이 국회 및 정부 고위 관리직의 여성 비율, 남녀 소득비, 여성의 교육 수준과 정치·경제적 참여 기회 등을 비교해 발표한 우리나라 여성의 현실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세계 13위인 ‘경제대국’이 받아들기엔 민망한 성적표다. 지방자치단체장 246명 가운데 여성 4명, 여성 지방의원 5% 미만, 여성 국회의원 14.7%….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청소년·장애인이 느끼는 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다. 특히 지난 5월4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전국 초등학생 4학년~고등학생 3학년 학생 543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학생들이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삶의 만족도·행복감 등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6개국 가운데 최하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는 사회적 약자를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뿌리 깊은 차별 의식에서 출발한다. 의식을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당장의 차별을 없앨 제도를 갖추는 건 비교적 손쉽다. 제도가 만들어지면 의식을 바꾸는 시간도 조금은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지방선거 여성 공약 가운데선 성인지(姓認知) 예산 편성 및 정책 실시, 성별 영향평가 실시, 성평등 조례 제정 등이 일단 눈에 띈다. 예산·정책을 세울 때 여성과 남성이 처한 사회·경제적 차이를 고려해 성 불평등을 없애는 것을 성인지적 접근이라고 한다. 가령 공공시설 화장실을 남성용·여성용 동수로 만들더라도 화장실 이용 시간이 남성보다 긴 여성은 결과적으로 차별받는 현실까지 감안하는 접근법을 말한다. 이 경우엔 여성용을 좀더 많이 만드는 게 성인지적 정책이 된다. 성별 영향평가는 한 정책이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해당 정책으로 더 많이 수혜를 받는 쪽은 어디인지를 미리 분석하고, 성차별 요인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다. 성평등 조례는 이런 정책들을 명문화해 강제하는 장치로서 의미가 있다.
이밖에 현재 12개월인 육아휴직 기간을 늘리는 대신 일정 기간을 무조건 아버지가 쓰도록 하는 남성 육아휴직 할당제(파파쿼터제), 비정규직 여성 산전후 휴가 보장, 육아휴직 급여 인상, 여성 고위 공무원 확대 및 공무원·공공기관 여성 채용 확대 등의 공약도 주목할 만하다.
경기도가 모티브된 학생인권조례
어린이·청소년 분야에선 아동·청소년 인권조례( 794호 표지이야기 ‘학생인권도 눈처럼 소복했으면’ 참조)가 손꼽힌다. 학생들이 직접 만들고, 지난 4월 경기도교육청이 발의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모티브가 됐다. 학생인권조례는 △체벌 금지 △야간자육학습·보충수업 선택권 보장 △두발 규제 금지 △특정 종교 과목 수강 강요 금지 △학생 자치활동 보장과 학칙 제·개정에 학생 참여 보장 등이 주요 내용인데, 지방선거 공약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장애수당 신설 또는 인상은 평균소득이 비장애인의 절반밖에 안 되는 장애인에게 매우 절실한 공약이다. 장애인 의무고용 확대나 자립생활 지원조례 제정은 장애인이 스스로 일어서는 데 도움이 된다. 활동보조인 서비스 확대 등 이동권 보장, 발달장애인 지원센터 설치 등도 장애인 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한 공약이다.
<hr>성과 없는 주민참여예산제, 있으나 마나 한 주민소환제, 바꿀 방법 없나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는 1989년 세계 최초로 주민참여예산제를 실시한 곳이다. 시 전체 예산의 20%를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제도다. 주민참여예산은 포르투알레그리 16개 지구의 지역총회에서 대강의 틀을 만든다. 지역총회엔 모든 주민이 참여할 수 있으며, 예산 담당 공무원과 시장도 참석해 의견을 나눈다. 각 지역총회에선 주민의 투표로 이듬해 예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주민대표의 가장 상급 기구인 참여예산 평의회는 시정부와 논의해 최종적으로 예산안을 결정한다.
처음부터 주민참여가 활발하진 않았다. 또한 주민의 모든 요구가 관철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먼저 적극적으로 참여한 마을에 어느 날 도로가 닦이고 전기가 들어오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내가 요구해야 필요한 곳에 예산이 쓰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격한 산업화·도시화로 인구가 폭증하면서 1980년대 포르투알레그리는 거주지의 3분의 1이 상하수도 시설이나 도로, 전기 같은 기반시설을 갖추지 못했는데, 이걸 만들어달라는 주민 요구가 조금씩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결과 주민총회에 체계적인 의견을 내기 위한 주민조직이 3천 개로 늘었다. 제도 시행 전보다 40% 증가한 수치다. 수도 공급률은 제도 시행 전 75%에서 현재 98%로, 하수처리 시설은 46%에서 98%로 늘어났다. 29개밖에 없던 학교도 86개로 늘었다. 더 큰 변화는 포르투알레그리 시민 대부분이 정치와 시의 현안에 관심을 갖고 시장이나 공무원과도 자유롭게 토론하게 된 것이다. 참여의 길을 열자 동네가 바뀌고 의식이 바뀐 셈이다.
투표율 50% 시대에 유권자 10% 서명받아야 하다니우리나라에서도 2003년부터 주민참여예산제가 실시되고 있다. 광주 북구와 울산 동구를 비롯해 이 제도를 도입한 기초자치단체는 40여 곳에 이른다. 하지만 실제로 주민참여가 활발하거나 눈에 띄는 성과를 낸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강제 조항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치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도록 한 탓이다.
주민의 지방자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 가운데 있으나 마나 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당선된 뒤 주민의 뜻을 거스르는 자치단체장·의원의 옷을 벗기기 위해 마련된 주민소환제가 대표적이다. 광역단체장의 경우 유권자의 10%, 기초단체장은 15%, 지방의원은 20%의 서명을 받아야만 주민소환을 청구할 수 있다. 게다가 유권자의 3분의 1이 투표에 참여해 과반이 찬성해야 소환이 이뤄진다. 지방선거 투표율 자체가 50%에 불과한 현실에서 주민소환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제도가 도입된 2007년 이후 실제로 주민소환에 성공한 사례는 전국에서 경기 하남시 화장장 유치와 관련해 소환된 임문택·유신목 전 시의원뿐이다.
이밖에 △친환경 무상급식 조례처럼 주민이 직접 조례안을 지방의회에 제출하는 주민발의 △지방자치단체장의 부당한 업무 전반에 관해 주민이 상급기관의 감사를 청구할 수 있는 주민감사청구 △자치단체장·지방의원이 예산낭비나 위법행위를 했을 때 주민들이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주민소송 △원자력발전소 유치처럼 주민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주요 정책을 주민 스스로 결정하는 주민투표 등 다른 주민참여제도도 넘어야 하는 ‘서명 문턱’이 높긴 마찬가지다. 어렵사리 청구 요건만큼 서명을 받더라도, 지방의회에서 주민발의 조례안이 외면당하거나, 감사에서 처벌까지 하세월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에선 주민참여제도가 오히려 주민참여를 가로막는다고 비판해왔다.
이런 비판을 수용해 이번 지방선거에선 주민소환·주민발의·주민투표 등의 청구 요건을 완화하겠다거나 예산 편성 과정에 주민참여를 의무화하겠다는 공약이 등장했다. 지방의회·지방정부를 좀더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하기 위해 모든 지방의회 회의를 공개하거나, 정책실명제·시민배심제(배심원으로 참여한 시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의견을 내는 것) 등을 실시하고 시민감사위원회를 운영하겠다는 공약도 나왔다. 실질적인 주민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주민참여기본조례 제정, 시민사회와 지방정부가 사전에 정책을 미리 조율하는 시민정책협의체 구성 등을 공약한 이도 있다.
이렇게 쏟아지는 주민참여 공약 가운데 어떤 걸 고를지, 그것을 지켜질 약속으로 만들지 아니면 잊어버리고 말 빈말로 만들지는 주민의 몫이다. 기억할 점은 주민이 지역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희망을 만드는 건 주인만이 할 수 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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