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빈곤 문제는 이제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밥을 굶는 극빈의 상황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은 더 심해지고 있다. “지금은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고 자식 교육을 잘 시켜 나중에는, 혹은 내 자식들은 잘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희망의 절대 빈곤’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나중에도, 혹은 내 자식들도 남들처럼 잘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절망의 상대 빈곤’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적 배제’의 현장
유럽 국가들은 빈곤을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경제적 결핍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빈곤층이 주류 사회와 분리돼 사회적 참여를 제한당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의 문제를 제기한다. 빈곤층의 사회적 고립과 주변화는 그 사회의 기본적 통합성을 해친다. 유럽연합(EU)과 회원국 정부는 이를 핵심 정책 문제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한국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그런 ‘사회적 배제’의 현장이다. 우리 국민 모두 영구임대아파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다. 영구임대주택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약 19만 호가 건설된 뒤 중단됐다. 빈곤층에게 저렴한 주거를 제공하고 적절한 사회복지 안전망과 자활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중요한 복지 증진의 수단으로 보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빈곤층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빈곤 문제에 잘 대처해 정책목표를 달성했는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는 평가에 더 무게가 두어진다.
이번 의 기획은 이런 우려를 현장에서 확인했다. 정부의 빈곤 정책 대상으로 표적화된 지역인 영구임대 단지를 통해 빈곤 문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다.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빈곤 문제에 대한 언론과 학계, 시민단체 등의 접근에 협조적이지 않다. 오히려 적대적인 상황이다. 빈곤층의 특성상 조사 거부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모든 가구를 2회 이상 접촉하는 ‘전수조사’ 과정을 통해 121 가구에 대한 면접조사, 20여 가구에 대한 심층면접이 이뤄졌다. 공공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언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현장 자료 수집이다.
그만큼 조사 결과는 무거운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조사 결과 밝혀진 점들은 우리나라 빈곤 문제의 심각성, 빈곤 정책의 취약성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이번 조사 결과, 주거비를 부담스러워하고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민들은 사회적·심리적으로 고립되고 있다. 낙인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단지의 슬럼화도 진행되고 있다. 전 국민의 의료보장 체계가 구축되었다는데도 의료의 문제, 심지어는 사망까지도 계층화 현상을 보인다. 빈곤의 장기화를 막아내기는커녕,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빈곤 세습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대책 없는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심각한 사회적 배제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통합성 위기가 이제 아슬아슬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복지병을 걱정할 만큼 복지가 있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탈빈곤 정책의 실패를 목격하게 된다. 영구임대주택 프로그램이 불필요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양한 공공임대주택 프로그램은 확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 빈곤 정책의 파편성과 비연속성은 짚어야 한다.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배제에 대응하려면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영구임대아파트 사업만 봐도 처음 몇 년간 건립 사업을 진행하다가 내팽개치다시피 중단됐다. 매번 이전 정부와 다른 ‘선전용’ 프로그램을 내놓다 보니 정책의 연속성도 떨어지고 일관성도 없다.
현 정부는 빈곤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주 도덕적 해이나 복지병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나라 빈곤 현상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복지 서비스가 나태함을 조장한다는 것도 너무 가벼운 인식이다. 도대체 우리나라가 복지병을 걱정할 만큼의 복지를 국민에게 줘본 적이 있던가. 극히 일부에서 나타나는 복지 의존의 모습을 침소봉대할 것이 아니라 사회 통합의 붕괴 양상에 이르고 있는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이 무거운 문제를 보는 정부의 책임의식도 더 진중해지기 바란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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